[청사초롱-손수호] 잃어버린 이순신의 바다
입력 2014-05-07 02:17
세월호. 이름부터 불온했다. 표기가 ‘歲月’이든 ‘世越’이든 도무지 바다를 겁내지 않는 작명이다. 해풍을 산 위에서 부는 바람쯤으로 안 것일까. 파도를 누나의 손등을 간질이는 물결쯤으로 여겼을까. 그날 서해 해상의 기상이 좋았다고 하지만 바람과 물결이 온순하다고 바다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선조들은 뭍의 맹수와 같은 맹골(孟骨)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췄다.
1597년 9월의 이순신도 그러했다.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우는 명량(鳴梁) 해협에서 진도 바다의 조류와 지형을 이용해 13척의 배로 133척을 깨부순다. 겸손과 용맹의 결과다. 그 울돌목에서 겨우 30㎞ 떨어진 곳이 맹골수도다.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승리의 바다가 치욕의 바다로 바뀌고 말았다. 오만했던가, 아둔했던가, 게을렀던가.
400년 전 그 바다에 일본 함선이 까맣게 나타나자 백전노장조차 공포에 떨었다. 이때 이순신은 가장 먼저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대장이 홀로 싸워도 겁먹은 부하들은 도망칠 틈만 보고 있었다. 장군은 몸을 사리던 거제 현령 안위에게 소리쳤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安衛敢死於軍法乎 退生去得生乎)” 안위는 다시 싸워 이겼다. 세월호에서 도망간 선원들은 산 것이 아니다. 충무공의 정신도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다.
다시 ‘난중일기’를 읽을 시간
전투를 앞두고 장군은 저 유명한 휘호 ‘必死卽生 必生卽死’를 썼다. ‘난중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밀물 때에 맞춰 우수영(右水營) 앞 바다로 진(陣)을 옮겼다. 적은 수의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장수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병법에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고, ‘한 명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눈앞에서 국민을 잃은 해경, 조선수군만도 못한 해군에게 소리치는 듯하다.
장군의 호령을 넘어 ‘천 개의 바람이 되어(A Thousand Winds)’가 들려온다.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부른 노래다. “나의 사진 앞에 서 있는 그대 제발 눈물을 멈춰요… 나는 그곳에 있지 않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해외에서 추모곡으로 널리 쓰이다가 김수환 추기경 선종과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 때 많이 불려졌다.
임형주는 일본 작곡가 아라이 만과 만나 저작권 문제를 해결한 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에 맞춰 재발매하려던 계획을 앞당겨 세월호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정했다. 이 얼마나 갸륵한 마음인가. 영문학자 장영희 교수도 생전에 “이 시는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몸은 사라져도 자연으로 돌아가 더 아름답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戰亂’은 일상 속에서 이어지니
그러나 아이들이 천 겹의 물속에 잠겨 있는 한 모든 게 허허롭다. 감미로운 선율을 들을 수도 없고, 남은 자를 위로하는 천상의 편지도 읽지 못한다. 건져내지 못한 주검 앞에 예술은 할 말이 없다. 그러니 그대들이여 하루빨리 깊은 어둠에서 빠져나와 지상의 가족과 장엄하게 이별하라. 그리고 투명한 햇살, 향기로운 바람, 길섶의 들국화로 다시 태어나 소풍 나온 그대들의 영혼과 만나고 싶다.
나는 단원(檀園) 김홍도에게도 묵념을 올린다. 가히 ‘신필(神筆)’로 불린 조선 화원의 이름이 비극의 상징으로 회자되는 것이 안타깝다. 국내 처음으로 화가의 호를 구(區) 이름으로 쓴 안산시가 아픔을 딛고 ‘아름다운 단원의 도시’로 거듭났으면 한다. 그 이름을 안고 태어난 단원고등학교도 신의 가호 속에 다시 일어서길 빈다. 남은 자들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모욕을 견디며 내부의 적들과 싸워야 한다. 전란(戰亂)은 일상의 바다에서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니.
손수호(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