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만큼은 내가” 싱글대디, 그들이 사는 방법
입력 2014-05-02 16:59
비정한 시대다. 지난달 대구의 한 20대 아버지는 PC방에 가기 위해 자신의 두 살배기 아들을 살해했다. 같은 달 충남 천안의 한 30대 아버지는 자신의 이성교제를 반대한다며 중학생 딸을 폭행해 숨지게 했다. ‘애끓는 부정’은 소설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표현일까. 아니다. 경악할만한 사건 한편에선 가시고기처럼 자녀를 품는 아버지도 있다.
지난달 22일 오후 6시 30분. 서울 강서구 까치산로8길의 구세군 한아름은 저녁식사를 하려는 열댓 명의 아이들과 어른들로 북적였다. 서울 유일의 부자(父子)가정 공동생활시설이다. 한 시간 뒤 있을 한아름 예배에 참석키 위해 모인 4명의 아버지와 12명의 자녀들은 여느 가정집처럼 머리를 맞대고 식사를 했다. 싱글대디 최성화(36)씨는 식사를 하며 아홉 살 난 딸의 자세를 고쳐줬다. “다리 벌리고 앉지 말고 예쁘게 앉아야지. 아가씨가.” 소풍을 하루 앞둔 딸은 잔뜩 들뜬 목소리로 아랑곳없이 준비물을 열거했다. “아빠, 아직 마트 안 갔다 왔지? 유부초밥은 꼭 해줘야 해.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랑 과자도 같이 꼭 싸 주고!” 참새처럼 재잘대는 딸의 말에 최씨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었다.
자녀 없이 살 자신이 없었다
최씨는 연년생 두 남매와 함께 사는 싱글대디다. 2005년 결혼한 그는 6년 만에 아내와 갈라섰다. 가장 흔한 이혼사유인 ‘성격 차이’ 때문. 이혼 직후 1년간은 전처가 아이를 돌봤다. 떡집 기술자인 그는 일자리가 생기는 대로 전국 이곳저곳을 돌며 일했다. 오전 4시30분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일하며 전처에게 생활비를 부쳤다. 착실히 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혼 뒤 갈피를 못 잡고 친구들과 어울렸다. 하지만 이내 곧 자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예전처럼 장난칠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다. “1년이 지나니까 더 이상 아이들과 떨어져 버틸 자신이 없더라고요. 자녀만큼은 내가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2012년 말 직장에서 얻어준 집으로 두 자녀를 데리고 왔다.
오후 내내 집안에 덩그러니 남겨질 아이들이 걱정됐다. 하지만 자녀를 맡아줄 사람을 구할 여유는 없었다. 최씨는 한부모가족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곳에서 구세군 한아름의 존재를 알게 됐다. 생활보호사가 상주하며 아이들을 돌본다는 데 마음이 끌렸다. 용인에서 지내던 그는 구세군 한아름 에 지원했고 지난해 7월에 입소했다. 주거비와 자녀 안전, 저녁밥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다. 같은 처지의 싱글대디를 만나 신앙생활도 시작했다. “구세군교회에서 이웃 섬기는 좋은 일을 많이 하다 보니 제 자신이 성숙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젠 저보다 자녀들이 더 봉사에 열심이에요. 용돈에서 헌금할 거 따로 떼놓고.” 심리적 안정감을 찾은 최씨는 삶의 목표도 세웠다. 자립기반을 마련한 뒤 이곳에서 만난 형들과 떡집을 차리는 게 그의 꿈이다.
최씨는 매일 밤 한살 터울 남매에게 팔베개를 해 준다. 남매는 이 때 하루 동안 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풀어놓는다. 그는 자연스레 자녀의 꿈과 관심사를 알게 됐다. 유행에 관심이 많은 첫째 딸의 꿈은 디자이너나 모델이다. 둘째인 아들은 과학자나 운동선수가 되는 게 꿈이다. 정작 그는 자녀들에게 바라는 게 없다. 그저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는 게 최씨의 바람이다.
싱글대디가 가장 힘든 일은 의외로 청소나 요리 같은 집안일이 아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었다. 최씨는 딸이 목욕할 때마다 당혹스러웠다. 직접 씻길 수 없어서다. 최근엔 아무래도 초등학교 2학년인 딸에게 사춘기가 찾아온 거 같다. “딸에게 자기만의 세계가 생긴 거 같아요. 예전과 달리 ‘소소한 반항’을 해요. 제가 사준 옷도 잘 안 입고요. 아빠는 여자들 스타일을 모른다는 거죠.”
아직 재혼생각은 없다. 자녀 둘을 대학보내기 이전엔 만나고 싶지 않다. 이젠 자녀들도 엄마가 없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했다.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는 최씨는 두 남매에게 아낌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 했다. “아이들을 저 자신보다 더 사랑해요. 더 이상 방황하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는 집안의 기둥이거든요. 기둥이 중심을 잡으면 자녀들도 올바르게 큽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싱글대디라면 스스로 바로 서는 삶을 살라 권하고 싶습니다.”
고난의 의미
이날 오후 7시30분. 구세군 한아름 원장인 홍봉식 사관이 이들 앞에 나섰다. 홍 사관 역시 이들과 같은 싱글대디다. 그는 지난해 아내와 사별했다. 홍 사관은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설교의 포문을 열며 고난의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하나님께서 왜 많은 이들에게 아픔을 주는지 궁금하죠. 저도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결론은 하나님이 뜻한 바라는 겁니다. 아쉽고 힘들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해해서 믿는 건 믿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믿는 게 믿음입니다. 마지막까지 희망과 소망을 잃지 맙시다….”
아버지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설교를 들었다. 설교를 마친 홍 사관은 공지사항을 전했다. 여름캠프는 동해로 가고, 내년엔 몽골로 ‘제2기 한아름 가족 희망캠프’를 떠난다는 내용이다. 한아름 가족 희망캠프는 싱글대디와 자녀가 해외의 빈민촌 어린이를 돕고 현지문화를 체험하는 일종의 봉사활동이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아버지들이 목소리를 높여 일정이 확정된 건지 물었다. 자녀와 함께 캠프에 참가하려면 미리 휴가를 내야 해서다. 지난 4월 캄보디아로 ‘제1기 한아름 가족 희망캠프’를 다녀온 박장호(40)씨 역시 관심을 보였다. “언젠간 어려운 이웃 돕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실천하긴 어렵잖아요? 그런데 캠프에 가면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니까 참 보람차죠. 아이들과 추억도 쌓고.”
‘포잡(Four job) 인생’, 헛고생은 아니었다
한쪽 팔뚝에 문신을 새긴 건장한 체구의 박씨는 이날 예배 후 기자와 만났다. 그는 ‘싱글대디도 잘 살 수 있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말하며 인터뷰에 응했다. 구세군 한아름에서 지내며 빚을 청산하고 자립한 그의 얼굴은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싱글대디를 선언한 이후 그의 인생은 결코 안락하지 않았다.
박씨는 두 살 터울의 아들 둘과 함께 2011년에 구세군 한아름에 왔다. 당시 그는 많이 지쳐있었다. 2004년 아내와 이혼한 박씨는 아침엔 퀵 서비스 기사, 점심엔 배달원, 저녁엔 대리운전기사로 일했다. 주말엔 주로 홍대에서 타투이스트(문신시술가)로 나섰다. 직업만 4개인 셈이다. 일부러 출퇴근이 자유로운 직업을 택했다. 형제 둘 다 만성천식이 있어 조심스러워서다. 그러던 어느 날, 세 부자가 모두 병원신세를 지게 됐다. 2010년을 강타한 신종인플루엔자에 걸린 것. 종합병원에 3명이 입원하니 진료비가 만만치 않았다. 몸이 아프니 당장 일을 할 수도 없었다. 이때 한부모가정의 정부지원을 찾다 알게 된 게 구세군 한아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2년 반 동안 지낸 뒤 전셋집을 얻어 자립했다.
그가 쉴 틈 없이 일에 몰두한 이유는 사업 실패로 인한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였다. 97년 결혼한 박씨는 천안에서 의류사업을 했다. 사업은 순조로웠다. 전국에 매장 5~6곳을 냈다. 하지만 의류사업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그의 매장 수익도 주춤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아홉 식구의 가장이었다. 장모를 비롯한 처갓집 식구 3명과 함께 살았다. 가세가 기우는데 계속 장모의 생활비와 몸이 안 좋은 처제의 치료비를 대긴 힘겨웠다. 이는 가정불화의 단초가 됐다.
“아무래도 아내가 장녀라 책임감이 강했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들어질수록 불화는 더 깊어졌지요. 이혼을 앞두고 아내는 재산분할 뒤 각자 아들 한명씩 데려가자고 했는데 그럴 순 없다고 했지요. 제가 유복자다 보니 두 아이에겐 절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집과 가게는 포기해도 자녀 둘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혼 뒤 그에겐 9000만원의 빚과 두 자녀가 남았다. 수중엔 25만원밖에 없었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경동시장에서 밤늦게까지 일했다. 술과 담배, 친구를 끊었다. 이를 악물고 일한 덕에 4년 만에 고시원에서 전셋집으로 생활터전을 바꿨다. 하지만 뜻하지 않았던 재혼은 다시 그를 무일푼 신세로 만들었다. 간경화를 앓던 그의 형에게 간을 이식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마침 교제하던 여성이 이식을 허락했다. 감사한 마음에 혼인신고를 하고 함께 살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씀씀이가 컸던 그의 두 번째 아내는 3~4번 집을 나가더니 전셋집의 보증금을 들고 떠났다.
앞이 보이지 않던 그에게 삶의 희망은 오직 두 아들뿐이었다. 구세군 한아름에 입소한 그는 4개의 직업을 갖고 쉬지 않고 일했다. 덕분에 빚은 깨끗이 청산했지만 건강을 잃었다. 만성피로로 오른쪽 청각을 대부분 잃고 신경성 편두통을 얻었다. 두통약이 없으면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고통. 그래도 힘든지 몰랐다. 중학교에 진학한 아들들은 밝게 자랐다. 가슴이 따뜻한 아이들은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왔다. 방과 후에라도 놀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라 했다.
지난해 박씨는 두 아들에게 숙제를 내 줬다. 숙제 제목은 ‘꿈 찾기’. 박씨에게 명문대를 보내겠다는 목표는 없다. 다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대학 입학 전까지 전폭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올해 중3인 첫째는 수학을 좋아하는데 아직까지는 구체적으로 갈 길을 정하진 못했어요. 딸같이 애교 많은 중1 둘째도 아직 고민 중 인 것 같고요. 그런데 첫째가 얼마 전 난생처음으로 학원을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더 공부하고 싶다고.”
아버지의 헌신으로 자란 형제는 일찍 철이 들었다. 아이들은 생일 장남감조차 가격을 보고 골랐다. 용돈도 헛되이 쓰지 않는다. 2년 전부터 형제는 그간 모은 용돈으로 아버지 선물을 한다. 재작년에는 더운 여름에 고생하는 아버지를 위해 기능성 티셔츠를 선물했다. 10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 그가 캄보디아 봉사를 위해 일을 한 달 쉬겠다고 했을 때 아이들은 ‘두 달 쉬라’고 답했다. 박씨는 어리광조차 부리지 않는 자녀들의 모습이 애처롭다고 했다.
형제는 지난해 의외의 생일선물을 내밀었다. 한 쌍의 반지와 편지였다. ‘아버지, 좋은 짝에게 드리세요.’ 박씨는 눈시울을 붉혔다.
“아이들이 자기들을 위해 아버지가 희생했다고 생각해요. 편지에 ‘아버지 인생을 찾으라’는 내용이 있더군요. 제가 헛고생 한 건 아닌 거 같죠?”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