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노트-오인숙] 고통이 없는 그 곳에서

입력 2014-05-03 02:45

우리 교회 장로님이 기도 중에 우셨다. 교직에 계셨던 그분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우셨다. 성도들도 따라 울었다. 거리의 모든 사람이 우울하다. 청소년들도 조용하다. 세상이 침울하고 우리는 분노할 힘도 잃고 무기력감에 빠져 있다. 항상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청년이 페이스북에 ‘언제부터 그렇게 아픈 이웃에 관심이 있었느냐? 우는 사람들이 가소롭게 여겨진다’는 두들겨 패주고 싶은 글을 올렸는데도 그 청년의 말에 반박할 수도 없을 만큼 슬픔을 당한 유족과 마음의 고리가 아프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한다. 소망의 끈을 붙잡아야 한다. 언젠가 외국에서 있었던 실화가 생각난다. 어느 가족이 저녁이면 가정예배를 드렸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아이들과 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천국에 가면 어떨까?” 하고 아버지가 세 자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형과 누나는 나름대로 천국에 대해 설명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막내가 아버지에게 자신 있게 대답했다. “천국에 가면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그래서 천사가 이름을 부를 거예요. 나는 키가 작기 때문에 천사가 내 이름을 부르면 ‘저요!’하고 크게 대답할거예요.” 막내는 발뒤꿈치를 들고 팔을 번쩍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가족들은 막내의 천진한 행동에 웃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얼마 후 이 가정에 상상할 수 없이 슬픈 일이 찾아왔다. 그토록 사랑스러웠던 막내가 교통사고로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가족들은 죽어가는 막내 곁에서 절망적인 슬픔으로 막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막내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저요!” 가족에게 소망을 준 말이었다. 이제 우리는 여객선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 아이들이 저 천국에서 “저요”하고 소리치는 모습을 소망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앉았던 의자는 아직 온기가 채 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출석부에는 아직 아이들의 이름이 남아 있을 것이다.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면 “저요”라고 대답하던 아이의 목소리를 우리는 이 땅에서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저 천국에서 고통 없는 그곳에서 아이들이 햇빛보다 더 밝은 웃음으로 “저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오인숙(치유상담교육연구원 교수·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