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 참사] “그래도 우린 장례라도…” 영결식 치른 유가족 160명 다시 진도 찾아
입력 2014-05-02 03:21
그들은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대응이 좀더 빠르고 치밀했다면 한 명이라도 더 살았으리란 믿음은 이미 자녀 시신을 찾아 장례까지 치른 부모들을 다시 전남 진도로 향하게 했다. 화창한 날씨를 뚫고 전해오는 그들의 한(恨)은 날이 서 있었다.
“우리 아이 살려내라. 구조 좀 똑바로 해라. 아이 목숨 함부로 하지 말고 구해라.”
사망자 유족들의 외침은 팽목항을 떠나지 못한 실종자 가족들의 그것과 같았다. 울분은 오히려 짙어졌다. 남은 가족들과 토끼 같은 아들딸을 함께 기다려주지 못했다는 마음에, 먼저 자녀들을 만났다는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며칠 전 자녀들을 떠나보내기 위해 안산으로 올라갔던 세월호 유가족들은 1일 진도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당초 오전 9시에 버스 4대로 130명 정도가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아픔을 나누려는 유족이 하나둘 늘어 결국 버스 1대를 더 빌려야 했다. 버스 5대에 나눠 탄 유족은 160명에 달했다. 버스는 이들을 태우느라 예정보다 1시간 늦게 출발했다.
오후 4시가 돼서 팽목항에 도착한 유족들은 사고 현장을 바라보고 섰다. ‘아이를 살려내라’ ‘구조 똑바로 해라’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또 어깨띠를 둘렀다. 그리고 아직도 차디찬 바다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자녀들에게 “아들딸아 보고 싶다”고 응원했다. 유족들은 그렇게 가슴 속에서 토해낸 몇 마디 말로 실종자 가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준비해온 피켓과 어깨띠 등에 대해 안전행정부 장례지원단이 “취지와 맞지 않다”며 비용 지원을 해주지 않은 데 대해 일부 유족들은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진도로 돌아온 유족들은 아직도 실종자가 이렇게 많이 남아 있다는 게 너무나 아프고 슬프다고 했다. 침몰 당시 가장 먼저 신고했던 고(故) 최덕하군의 아버지 성웅(52)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실종 학생을 구하는 게 우선이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아들딸을 기다리는 가족들과 슬픔을 나누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다른 유족은 팽목항을 맴돌던 실종자 가족을 끌어안고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유족이 입은 하얀 티셔츠 뒤에 적힌 ‘보고 싶다. 사랑한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란 글귀만이 이들의 고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들보다 앞서 오전 10시30분 진도실내체육관을 찾은 정홍원 국무총리는 정반대였다. “죄송하다”는 말은 있었지만 타들어가는 실종자 가족들의 마음을 만져주지는 못했다.
수행원과 함께 진도체육관에 들어선 정 총리는 가족들과 악수부터 나눴다. 정 총리는 이후 단상에서 “여러분 앞에 설 면목도 자신도 없다.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상황을 설명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어 “실종자 시신 유실이 가장 걱정된다”며 “유실 방지책으로 3중 막을 쳐놓고 있고, 어제부터 오늘 사이 수협중앙회장, 진도수협장에게 어민(어선)이 모두 동원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족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눈을 맞추려 애쓰며 정부의 노력을 설명했지만 가족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총리가 자리를 떠난 후 해양경찰청장 등이 나서 질의응답을 하려 했으나 가족들은 곳곳에서 고함을 치며 격한 반응을 쏟아냈다.
진도=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