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대리 트라우마’ 어떻게 치유할까] 온 국민 슬픔·분노 전염… 무기력증 확산
입력 2014-05-02 02:04
#1. 두 아들이 중학생인 주부 신재희(가명·42)씨는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걸핏하면 울며 지낸다. 평소라면 잔소리를 달고 살았을 시험기간에도 “공부하라”는 말은 한 번도 못했다. 대신 “엄마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라고 말했다. “엄마 갑자기 왜 그래.” 쑥스러워하는 아들들을 보며 신씨는 자신이 너무 예민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자꾸 세월호 소식에만 눈이 갔다. 뉴스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나고 자식 잃은 부모들 생각이 나서 괴로웠다.(일반적인 애도반응 사례)
#2. 1년쯤 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치료가 끝난 이혜주(가명·38·여)씨는 얼마 전 다시 병원을 찾았다. 세월호 사고 이후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게 됐기 때문이다. 이씨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사고로 숨지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뒤 몇 년간 불안 장애에 시달렸다. 오랜 치료 끝에 정상적인 삶을 회복했다. 다 나은 줄 알았던 마음의 병은 세월호를 계기로 이씨의 삶을 다시 짓누르고 있다.(대리 외상의 위험한 사례)
#3. 고3 아들을 둔 박성우(가명·51)씨는 요즘 아들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든다. 세월호 사고가 자신과 무관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박씨는 늘 아들에게 “좋은 대학에 가고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는 게 성공한 삶”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사지로 내몬 건 돈벌이와 효율만 따졌던 어른들이었다. 자신 역시 성과중심주의에 빠진 기성세대였다. 박씨는 자신 역시 세월호 참사 책임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자책을 떨칠 수 없었다.(죄책감을 느끼는 대리 외상 사례)
◇대부분은 자연스러운 애도반응=세월호 침몰 사고는 5000만 국민을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만들었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것을 TV로 지켜보면서, 실종자들이 빠져 있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늘어지는 구조작업에 분노하고 절규하는 실종자 가족의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미안해하고 있다.
슬퍼하고, 화를 내고, 무기력해지고, 새삼 주위사람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전문가들은 세월호 사건의 규모나 성격 등을 고려하면 전 국민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애도반응’이라고 말한다. 간접체험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이어지는 ‘대리 외상(Vicarious Trauma)’은 아니라는 것이다.
애도반응은 보통 1∼2개월 지나면 차츰 극복된다. 세월호 사고를 다시 떠올려도 지금처럼 슬프거나 고통스럽지는 않다. 일상 회복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세월호 사고 이후 어느 정도 우울감과 불안감을 느끼더라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슬프면 슬퍼하고 화가 나면 왜 화가 나는지 따져보면서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다. 자녀가 우울해하는 듯 보이면 “네가 지금 슬프구나” “엄마(아빠)도 슬프네”라며 아이 감정을 인정하고 공감해주면 된다.
◇‘대리 외상’ 위험군=위험군은 상실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 우울증·불안장애·PTSD를 겪었거나 겪고 있는 이들, 평소 예민하고 사회 적응에 취약한 사람들이다. 건강한 애도반응이 자연스럽게 치유되는 대신 대리 외상으로 빠질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남성보다는 감정이입을 더 깊이 하는 여성이 취약하다.
세월호 사고는 대리 외상을 극대화할 수 있는 요인이 많다. 모두가 감정이입이 가능한 어린 피해자들, 살릴 수 있었던 생명을 수장시킨 부실한 시스템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 매일 생중계되는 참사 현장, 사고 수습이 늦어지면서 생기는 피로감과 불신까지 겹쳐 있다.
이병철 한림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일본은 교통사고가 일어나도 일반 시민들이 끔찍한 장면을 못 보도록 가림막을 들고 서 있다”며 “사고 조사나 시신 수습만큼이나 심리적 지원도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침몰 장면과 피해자들의 오열 모습이 실시간 생중계된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
실제 정신건강의학과에는 치료를 완료한 환자가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런 환자들은 TV로 생중계되는 참사 현장을 머릿속에서 지속적으로 되돌려 대리체험하면서 세월호 피해자들의 감정에 깊이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대리 외상에 취약한 사람들에게 TV를 끄고 밖으로 나가라고 권한다. 운동이나 산책을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가벼운 마음을 갖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힘들면 전문가의 도움을 청하는 게 좋다.
◇국가 차원의 외상후 성장 필요=전 국민의 대리 외상을 최소화하려면 가장 필요한 것은 빠른 사고 수습이다. 사고 수습에 속도를 내면서 대리 외상을 극복해 ‘외상후 성장’에 이르러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어려운 일을 헤쳐나가며 더 좋은 에너지를 만들어 극복해야 하는 게 우리 사회에 주어진 중요한 과제라는 것이다.
최삼욱 을지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상처만 자꾸 들여다보고 잘못 만지면 덧나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내버려두면 곪아 터질 수 있다”며 “그동안 수많은 참사를 겪었으나 국가적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지 못했다. 이 점을 반성하고 이번에는 어떻게 달라질지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극복하는 것은 잊는 것과 다르다. 다시 일어서되 상처에는 처방이 필요하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지금의 분노와 슬픔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승화돼야 한다”며 “우리 사회의 여러 병폐를 고쳐나가도록 정부도 국민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Key Word-대리 외상
사건·사고의 당사자가 아닌데도 간접 경험으로 인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빠지는 현상. 주로 참혹한 사건·사고를 자주 접하는 경찰관 소방관 간호사 심리치료사들에게 나타난다. 일반 국민들도 반복되는 영상이나 관련 뉴스에 장기간 무차별적으로 노출될 경우 유사한 형태의 심리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