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과 치욕… 두 얼굴의 미국을 성찰하다

입력 2014-05-02 02:21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필립 로스(81)에게 1998년 퓰리처상 수상의 영예를 안긴 ‘미국의 목가’(문학동네)가 국내 초역됐다. 필립 로스는 ‘미국의 목가’를 시작으로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와 ‘휴먼 스테인’으로 이어지는 ‘미국 3부작’을 발표하며,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만큼 ‘미국의 목가’는 가장 미국적인 이야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은 작가의 분신이라 할 네이선 주커먼이 1990년에 직접 만나기도 하고 소식을 전해 듣기도 한 스위드 레보브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나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유대계 미국인인 스위드는 뛰어난 외모와 온화한 성품, 거기에 운동 능력까지 갖춘 위퀘이크 고등학교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2차 대전 후의 호황기를 누리며 자란 미스 뉴저지 출신의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하고, 아버지의 장갑공장을 물려받는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전원적인 집까지 마련한다. 목가적인 삶을 향한 그의 꿈이 완벽히 실현된 듯 보이던 1968년의 어느 날, 스위드의 찬란했던 꿈은 산산이 깨지고 만다. 딸 메리가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며 우체국 폭탄 테러를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살아 있는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이었던 스위드의 삶은 역사적 광풍 속으로 휘말려든다.

스위드를 고등학교 시절의 선망의 대상으로 기억하고 있는, 이 소설 속의 작가 주커먼은 1995년 동창회에서 스위드의 동생이자 자신의 동창생인 제리로부터 스위드의 비극적 인생에 대해 전해 듣는다. 그리고 그에 관한 ‘사실주의적인 연대기’를 쓰고자 하는 작가적 열정을 느낀다. 바로 그 열정, 다시 말해 주커먼이 스위드의 삶의 진실로 들어가는 과정 속에 녹아든 열정은 이 소설이 쓰여지는 과정인 동시에 그것을 읽는 독자가 당대 미국이 앓고 있던 고통을 함께 겪어내는 과정의 열정으로 승화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단순히 유대인의 목가가 아니라 마침내 미국의 목가로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어 고뇌하는 스위드와, 역시나 그걸 궁금해 하며 스위드의 삶을 파헤쳐가는 주커먼을 통해, 작가는 미국의 목가가 파괴된 이유를 찾아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끝없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 그들의 요새는 금이 갔다. 여기 멀리 떨어진, 안전한 올드림록에서도. 이렇게 한번 벌어진 이상, 다시는 아물지 않을 것이다. 절대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들에게 맞서고 있었다. 그들의 삶을 좋아하지 않는 모든 사람, 모든 것이 맞서고 있었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모든 목소리가 그들의 삶을 비난하고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 뭐가 문제인가? 도대체 레보브 가족의 삶만큼 욕먹을 것 없는 삶이 어디 있단 말인가?”(2권 288쪽)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치욕이 교차하는 미국의 두 얼굴이다.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갔던 무수한 참전용사 ‘아버지’들은 졸지에 반전주의자 ‘아들’들의 비난을 받는 처지가 되고, 피땀 흘려 일군 가업은 인종차별에 반발한 흑인들의 폭동으로 위기에 직면한다. 지식인들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고 냉소주의에 빠진다. 스위드처럼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시민들은 졸지에 역사의 놀림감이 되었다는 절망에 빠진다. 예컨대 미국인들이 숭배하던 규칙들이 더 이상 현실성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미국의 두 얼굴 가운데 하나는 예스러운 아메리카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대의 출현이다. 그렇기에 필립 로스의 시선은 항상 미국 너머를 향해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목가’를 읽는 내내 드는 상념은 한국 문학엔 왜 필립 로스 같은 작가가 없을까, 하는 의문이다. ‘미국의 목가’가 아니라 ‘한국의 목가’를 읽을 날은 언제일까.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