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 참사] 단원고 생존 학생들 “친구들아 미안해”… 눈물의 마지막 인사
입력 2014-05-01 03:32
까까머리 남학생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빨갛게 상기된 눈으로 분향소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입구에서 출구까지 100m에 이르는 분향 동선을 절반쯤 걸었을 때 “어!” 하고 낮게 소리쳤다. 고개를 숙인 채 아들과 걷던 어머니도 걸음을 멈췄다. 아들이 가리킨 곳에는 절친했던 친구의 영정이 놓여 있었다. 영정을 말없이 쳐다보던 어머니는 오열하는 아들을 토닥이다 끝내 함께 눈물을 쏟았다.
세월호 침몰 당시 구조돼 고대안산병원에서 치료받던 단원고 학생 70명이 30일 안산 화랑유원지의 정부합동분향소를 찾아 희생된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생존자 학부모 대표 장동원(45)씨는 “아이들이 친구들 가는 길을 꼭 봐야겠다고 했다”며 “심리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라 말렸지만 자신들이 직접 대표를 뽑아 결정하는 걸 보고 허락했다”고 말했다. 조문객 200여명은 아이들의 조문을 묵묵히 바라봤다. 취재진도 학생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학생들은 오후 2시쯤 고대안산병원에서 퇴원했다. 백팩을 멘 학생도 있었고, 곰돌이 인형을 들고 병원을 나선 학생도 있었다. 학생 70명과 학부모들은 45인승 버스 6대에 나눠 타고 오후 2시17분쯤 분향소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학생들의 교복 왼쪽 가슴에는 노란 리본이 달려 있었다. 학부모들도 검은 옷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 학생들은 20여분간 친구들을 조문했다. 작별 인사는 짧고 아쉬웠다. 그들은 조문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딸과 함께 온 어머니는 딸 친구의 영정 사진을 보자 고개를 떨궜다. 사진 앞에 놓인 조화에 입을 맞춘 채 30초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딸은 왼손으로 어머니의 등을 토닥이며 오른손으로 조화를 만지작거렸다. 180㎝가 넘는 키의 건장한 남학생도 숨을 헐떡이며 눈물을 흘렸다. 흰색 교복 셔츠 소매가 눈물로 젖었다. 아버지는 손수건으로 아들의 눈물을 닦아줬고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바라봐야 했다.
세 번째 버스에서 내린 한 여학생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눈은 퉁퉁 부었고 머리는 헝클어졌다. 짧은 조문을 마친 뒤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여학생은 대여섯 차례 뒤를 돌아보더니 입술을 꽉 깨물고 두 손을 모아 눈을 감았다. 버스에 올라서야 눈물을 터트린 학생의 얼굴이 창문에 비쳤다.
자녀를 위로하던 학부모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한 아버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는 딸의 교복 깃을 연신 쓰다듬었다. 무언가 말하려던 아버지는 몇 번이나 딸을 향해 몸을 숙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못한 채 함께 울고 말았다.
자원봉사를 나온 단원고 졸업생 선배들도 눈물을 쏟았다. 단원고 1기 졸업생 명찰을 목에 건 여성은 입구에서 학생들에게 조화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오열하는 후배들을 보곤 같이 울음을 터트렸다. 옆에 있던 3, 5기 졸업생도 서로 손을 잡은 채 눈물을 흘리며 학생들에게 휴지나 손수건을 건넸다.
조문객들도 함께 울었다. 김모(56·여)씨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어떡해, 어떡해”를 연발하며 눈물을 닦았다. 김씨는 “애들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쫓기듯 조문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미안해서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직장인 김성준(38)씨도 “그들의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느껴져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며 “아이들에게 평생 마음의 짐이 될 것 아니냐. 무능력한 어른으로서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고 울먹였다. 또래 학생들도 이곳 분향소를 찾았다. 강서고 2학년 위다정(17)양은 “중학교 때부터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이번에 사고를 당했다. 친구들이 바닷물 속에서 차갑게 식어갈 동안 정부는 뭘 했는지…. 다들 좋은 곳으로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원도 강릉에서 3시간 버스를 타고 왔다는 이모(44·여)씨는 ‘너희를 생각하면 부들부들 떨린다. 너희를 지키지 못한 미안함 그리고 무능력한 정부에 대한 분노 때문에. 감히 너희의 마음을 내가 짐작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편한 곳으로 가서 쉬길’이라는 내용의 메모지를 분향소 옆 게시판에 붙였다.
안산=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