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4년간 해양안전심판원 ‘재결서’ 분석해보니… 과실로 다수 희생돼도 ‘시정권고’
입력 2014-04-30 04:52
29일 국민일보 취재팀이 2010년부터 올 1월까지 약 4년간 선박 침몰 사고에 대한 심판원의 재결서(판결문) 36건을 분석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 해양안전심판원은 해양 사고를 심판하는 합의체 행정기관으로 해난 사고의 원인을 밝히고 잘잘못을 따져 징계까지 내리는 역할을 한다. 심판원의 ‘봐주기’ 처벌이 계속될 경우 제2의 세월호 사고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2009년 10월 18일 오전 1시37분쯤 해양폐기물 전용 수거선인 ‘환경 1호’가 울릉도 쌍정초등대 북쪽 210마일 해역의 대화퇴어장에서 침몰했다. 환경 1호는 엿새 전 경북 포항시 구룡포항에서 출항해 이 해역을 돌며 폐어망 등을 수거하는 중이었다. 선장은 실종됐고 선원 4명은 숨진 채 발견됐다. 심판원은 초속 14∼16m의 강한 바람으로 4m에 달하는 높은 파도가 선체 갑판을 덮치면서 그동안 수거했던 3t가량의 폐어망이 한쪽으로 쏠려 배가 기울었다고 판단했다.
이 사고의 이면에는 선주의 안일한 대처가 있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풍랑주의보가 발효돼 있었지만 통신장비가 고장 나 선장은 기상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갑판에 널려 있던 폐어망을 고정시키는 등 풍랑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임을 까맣게 모른 채 작업하다 사고를 당했다.
선장은 사고 전 선주에게 “통신 장비가 이상하다”고 보고했지만 선주는 적절한 안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고 현장은 환경 1호의 지정된 항해구역을 벗어난 곳이었다. 먼 바다를 항해하려면 적절한 설비를 갖추고 선박검사를 받아야 했는데 선주는 이마저도 무시했다. 해당 항로를 한 번도 다녀보지 않은 이를 선장으로 임명한 책임도 인정됐다. 재결서는 ‘선주에게 직무상 과실이 있다’고 분명히 명시했다. 그러나 선주에게 최종 내려진 조치는 강제력이 없는 ‘시정권고’뿐이었다.
2010년 12월 13일 오전 4시30분(한국시간)쯤 뉴질랜드 남쪽 1400마일 남극해역에서 조업 중이던 원양어선 ‘제1인성호’가 침몰했다. 선원 5명이 사망하고 선장 등 17명이 실종됐다.
심판원은 사고 원인으로 선장의 과실을 지목했다. 선장은 사고 25분 전 갑판원으로부터 배가 심하게 요동치고 우현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도 잠수펌프 확인 등의 안전점검을 하지 않은 사실이 인정됐다. 선원들에게 퇴선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다. 심판원은 3m 높이의 파도와 초속 10∼13m의 강한 바람 등도 피해를 키우긴 했지만 선장의 과실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봤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등 5개국에서 온 선원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도 문제였다. 안전수칙은 한국어로만, 구명설비 작동법 등은 한국어·영어로만 작성돼 있어 이들은 비상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선장이 실종된 상태여서 선사에 엄벌이 내려질 것으로 예상됐지만 심판원은 역시 개선권고만 했다.
해양 사고의 경우 1심과 2심은 심판원에서 재결하며 이에 불복할 경우 대법원에서 3심 재판이 진행된다. 그만큼 해양 사고 처리에서 심판원의 비중이 크다.
재결서를 보면 최근 4년간 선박 침몰의 책임이 인정돼 심판원에서 징계 처분을 받은 인원은 50명이다. 선박에 안전 장비를 설치하지 않은 선주와 위기 발생 시 적절히 대응치 못한 선장 등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중징계인 면허취소를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6명은 개선권고, 24명은 시정권고만 받았다. 10명은 경고에 해당하는 견책, 다른 10명은 1∼2개월 업무정지 처분이 내려졌다. 업무정지는 정지 기간이 끝나면 바로 다시 배를 탈 수 있다. 지난해에는 업무정치 처분의 부담을 덜어주는 징계 집행유예 제도까지 도입됐다. 1∼3개월 이하의 업무정지를 받을 경우 직무교육 등으로 징계를 대체하는 방식이다.
해양안전심판원 관계자는 “내부 규정에 따라 사고 원인과 책임 주체를 조사한 뒤 적합한 처분을 내린 것으로 통상 선주에게는 개선이나 시정 권고가 내려지는 게 일반적”이라며 “집행유예제 역시 선원 중 생계가 어려운 사람이 많아 실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실이 분명하고 사망자가 발생한 경우에도 책임자에게 경미한 처분만 내린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철승 목포해양대 교수는 “아직도 장비 조작법조차 모르는 채 항해에 나서는 선장도 있고 기상상태가 안 좋아도 출항 명령을 내리는 선주도 많다”며 “해상 사고의 70∼80%가 인재인 만큼 과실이 정확히 드러날 경우 심판원에서 그에 맞는 처벌을 내려 해상 안전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