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향기는 어디서 오는가

입력 2014-04-30 02:58 수정 2014-04-30 15:47


그 새벽의 은모래에선 향기가 난다. 은모래를 밟으며 떠나는 자들의 손바닥에선 향기가 난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 사이의 금빛 인사들에선 향기가 난다.

길고 부드러운 빛의 손가락. 모든 자궁 속에 가만히 앉아 쉬임없이 생명을 나르는 탯줄처럼 그렇게 다정한 봄밤 한때 노오란, 노오란 불빛들에선, 불빛들의 사각거림에선 향기가 난다.

저 불빛을 어쩔 것인가

온 몸이 눈이 되어 빛을 핥고 있는 저 불빛



보고지고 보고지고



꽃술 뛰어내림 보고지고 <졸시 ‘꽃술’ 전문, 시집 “바리연가집”에서>

기다림의 문자메시지 조심히 읽는 눈에선 향기가 난다. 노오란, 노오란 리본으로 펄럭이며 울타리 가득, 가슴 가득, 방울방울 혈관 가득 기다릴게, 그러나 지금 현재, 여기, 그리고 떠나간 이가 영원, 아니 불멸이라고 생각하며 꿈꾸는 이에게선 향기가 난다.

검푸른 절망을 노오란 희망으로 바꾸는 이에게선 향기가 난다.

그때 그러지 말 것을… 하면서 후회하는 눈물에선 향기가 난다.

후회하며 그 누군가에게 단단히 닫힌 현관문을 열어주는, 또는 아픈 이의 몸을 부축하며 계단을 오르는 이의 긴 그림자, 그 따뜻한 배려에선 향기가 난다.

우리 모두 주민등록증의 번호 하나로 존재하는 하찮은 존재일지라도, 밤을 새우며 다음 날의 일을 준비하는 이에게선 향기가 난다. 사소하고 하찮음의 위대함을 아는 이에게선 향기가 난다.

지극한, 그래서 말없는 슬픔에게선 향기가 난다. 힘든 봄밤의 목숨에게서 어찌 향기가 나지 않을 수 있으랴.

결코 보이지 않는 일출 또는 석양을 보는 이의 눈에선 향기의 광채가 난다. 어둠이 떠오른다. 길이 걸어가는 소리, 하나의 길이 두 개의 길과 한데 몸 섞는 소리. 모든 향기나는 것들 위로 풍선처럼 별처럼 떠오르는 길.

간절한 기도에게선 향기가 난다. 기도하는 이들의 합장한 손에서, 절하느라 굽힌 허리에선 향기가 솟아오른다. 아, 이 봄밤 모두 기도가 되자. 떨어지는 것들에 한껏 엎드리는, 높이 솟은 허리로 허공을, 허공의 키 큰 파도를 떠받치자.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