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형 칼럼] 마지막 대답(Final Answer)

입력 2014-04-29 02:14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는 잡히시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려간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런데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를 뒤따라 대제사장의 집 안마당에까지 슬쩍 들어간다. 마태복음 26장의 기록이다.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호기 넘친 베드로가 잡히시기 전의 주님께 고백한 절절한 내용. 그러나 그 역시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를 버렸다. 아, 인간 의지의 연약함이란. 그런 그가 왜 잡히신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안마당까지 갔는가. 말씀이 이어진다. “베드로는 ‘결말을 보려고’ 안으로 들어가서….”

베드로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결말을 보는 것’이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3년여의 세월, 열정은 넘쳤고 소망 또한 충만했다. 일상의 의무조항에 응답하며 그저 동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살던 베드로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가 생겼다. 위대함의 길을 향한 가능성이 열렸다. 그 의미에 눈 뜬 순간 그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다. 자신의 가족도, 어부로의 경력과 생계수단도, 아마 사랑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3년은 ‘참 좋았던 시절’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한 황홀 그 자체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잡혔다! 그리스도(메시아)이신 그분이 허망하게 잡혀 돌아가실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절망이었다. ‘아, 3년의 세월은 정녕 어떤 의미였던가. 모든 것이 허상이었단 말인가.’

절망 속 베드로의 마음에 오직 한 소망만이 자리 잡았다. ‘결말을 봐야 한다. 결말을. 이 이야기의 끝을 봐야 한다고….’ 그가 원했던 것은 “나를 따르라”고 명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대답이었다. 결말을 보고, 마지막 대답을 듣기 위해 베드로는 가야바의 집 안마당으로 초라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린 누구인가. 결말을 봐야 할, 마지막 대답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다. 어차피 운명처럼 이 길로 들어섰다. 은혜요, 섭리의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을 걸어가는데 너무나 많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그분의 실체가 보이지 않아 괴롭다. 고통의 현실에서 메시아이신 그분은 침묵하신다. 우리 주위에 보이는 거대한 악, 지독한 슬픔에 비해 그분은 너무나 작아 보인다. 솔직히 고통 가운데 뜻을 찾는 것도 지겹다. 유약한 종교인들의 견강부회 같다. 그래서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던 제자들과 같이 우리 또한 달아나려 한다.

그러나 결코 달아날 수 없다. 멈칫멈칫 하며 우린 베드로와 같이 가야바 집 안마당까지 들어가게 된다. 우리 역시 결말을 보고 싶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대답을 듣기 원하기 때문이다. 그날이 오면 그분은 분명 이 모든 미스터리에 대한 마지막 대답을 해 주실 것이다. 그래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결말을 보기 전까지, 마지막 대답을 듣기 전까진 끝나지 않았다. 끝낼 수 없다. 예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린 서로의 마지막 대답이다.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계속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믿음 갖고, 이 소망 품고 나갈 때 결말에 이를 수 있다.

세월호 침몰로 인해 너무나 많은 사람이 아픔을 넘어 절망하고 있다. 반드시 이 슬픔에 대한 마지막 대답을 들어야 한다. 결말을 보기 위해선, 최후의 대답을 듣기 위해선 살아야 한다. 이 슬픔 견디며 삶을 살아내야 한다. 부디 살아 주시기를…. 그리고 끝내 이기시기를….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 소장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