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압축성장의 외상장부를 처리하라

입력 2014-04-28 03:34


“버려둔 ‘기본’ 다시 따지고 점검해야… 안전불감증보다 집단망각증이 더 무서워”

사태의 시작은 아마 1993년 10월 서해페리호 침몰 때부터였지 싶다. 오랜 일본 체류 끝에 귀국한 직후였기에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압축성장의 결실이 88서울올림픽의 성공으로 이어지면서 선진 대한민국이 곧 눈앞에 펼쳐질 것처럼 들떠 있던 분위기와 페리호 침몰 사고는 기묘한 대조를 이뤘다.

연휴 끝에 어떻게든 배를 타고 귀가하겠다는 승객들, 140여명의 정원을 초과한 채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출항을 감행한 선사의 욕심, 사고 대비 훈련에 소홀했던 무신경이 한꺼번에 최악의 상황으로 엮이면서 292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간의 자부심은 허세에 불과했고 우리 사회는 이곳저곳에 ‘기본부재’라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이듬해 10월 성수대교 상판 붕괴 사고는 한국의 압축성장을 상징하는 표현인 한강의 기적을 조롱이라도 하듯 등굣길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부실공사와 더불어 정기적인 안전점검조차 하지 않았고 과적차량 통행을 방치한 탓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95년 6월 벌어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또한 부실시공, 용도변경을 둘러싼 뇌물수수, 안전관리 미흡 등이 원인으로 밝혀졌다. 기본부재의 모습이 거푸 확인된다.

사실 90년대 이전에도 대형 참사가 적지 않았다. 70년대 벌어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남영호 침몰 사고, 해군 예인정 침몰 사고 등. 그럼에도 그 사고들은 안타깝게도 안전관리·감독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고 구성원의 안전의식 수준 또한 낮은 데서 비롯된 이른바 후진국형 참사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의 참사는 더 이상 후진국 운운하는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형 사고가 터질 때마다 숱한 예산을 쏟아 붓고 갖은 관련 매뉴얼을 마련하는 등 시스템 정비를 꾀해 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도 어슷비슷한 ‘인재(人災)’ ‘후진국형 참사’가 반복되는 것은 왜인가.

90년대 초 대형 참사를 보면서 ‘압축성장의 외상장부’ 탓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압축성장은 단기간 내에 성과를 추구하는 고지점령형 성장전략의 결실이다. 목표만 바라보고 달리는 과정에서 장애물이 생기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어넘었고 그 때문에 ‘하면 된다’ 식의 성공담만이 상찬을 받는다는 가치관이 뿌리내렸다.

편법이 난무하고, 상식보다 기발한 임기응변의 전술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사람들은 과정보다 결과, 성취보다 성공, 함께 가기보다 앞서가기, 윤리적 가치보다 경제적 실리, 공동체보다 개인의 이익을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체득하기 시작했다. 압축성장 이데올로기는 아이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쳐 도덕적 가치는 모범답안 작성 때만 존중되고 일상에서는 반(비)도덕적 논리에 심취토록 유도했다.

그 와중에 공동체적 가치, 인격적인 관계는 크게 훼손됐고 최소한 지켜야 할 안전, 인권, 정의, 배려 등의 가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렇듯 무시됐던 가치들은 그러나 현장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기에 이를 소홀히 하면 엄청난 참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90년대의 대형 참사는 마치 압축성장의 외상전표가 끊이지 않고 날아든 것과 같다.

문제는 압축성장의 외상전표, 외상장부가 90년대로 전부 결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유치원생들을 화마에 떠맡긴 99년의 씨랜드 화재 사고, 기관사가 먼저 탈출한 2003년 대구지하철 사고, 구명조끼도 입히지 않고 학생들을 바닷가에 밀어 넣은 지난해의 해병대 캠프 사고, 올 2월 경주 리조트체육관 붕괴 사고, 수색·구조작업이 진행 중인 세월호 침몰 사고에 이르기까지 원인은 한결같이 ‘기본부재’다.

압축성장 외상장부의 끝 페이지는 아직 안 보인다. 사람들은 시스템 부재를 흔히 지적하지만 핵심은 압축성장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각, 즉 잊고 버려둔 ‘기본’을 다시 따져보고 점검해야 한다. 이 일은 정부뿐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의 몫이다. 안전 불감증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사회의 집단망각증이다. 대체 언제까지 압축성장의 외상장부에 발목 잡혀 있을 것인가.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