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정승훈] 매뉴얼

입력 2014-04-28 02:35

“어른들이 학생들을 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구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선 먹먹했다. 안산 단원고 학생들과 심리상담을 한 정운선 교육부 학생건강지원센터 센터장은 “아이들은 세월호가 물 위에 떠 있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어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으로 느끼고 있다”고 했다. 거리를 오갈 때 마주치는 교복 입은 아이들을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다. 대체 어른들은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무엇을 만들어 놓은 것일까.

해양수산부의 위기대응 매뉴얼을 보고선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대규모 해양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충격 상쇄용 기사 아이템을 개발하라’는 내용을 들으며 분노가 아니라 치욕감이 느껴졌다. 이 뉴스를 보며 아이들은 또 어떤 생각을 할까.

매뉴얼은 사실 설명서에 불과하다. 직무를 수행할 때 필요한 지식과 직무 수행 단계별 방법에 대해 기본적인 사항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해당 직무를 수행하는 개개인의 성향이나 능력 차이에 상관없이 기본적인 역할 수행을 담보하기 위한 목적이다.

세월호 사고에서 매뉴얼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매뉴얼대로 움직였어야 할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매뉴얼을 운용해야 할 사람은 막상 현실이 닥치자 허둥대기만 했다. 글귀만으로도 국민의 공분을 일으키는 매뉴얼 내용도 드러났다. 매뉴얼 무용론 논란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매뉴얼을 갖고 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건 명확하다. 그러면 뭘 해야 하나. 매뉴얼을 다 바꿔야 할까. 많은 전문가들은 매뉴얼에 따른 훈련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어느 조직이든 대부분 매뉴얼을 갖고 있다. 처음 신문사에 입사했을 때 ‘수습기자 매뉴얼’을 봤던 기억이 난다. 보고는 이렇게 하고, 취재는 저렇게 하고, 기사는 어떻게 쓰고…. 매뉴얼을 외울 정도였지만 보고하면서 지적받고, 취재 못해서 꾸중 듣고, 기사 잘못 써 깨지는 생활은 오랫동안 반복됐다. 어느 곳에서든 매뉴얼을 숙지하는 과정은 비슷하다.

해본 사람은 매뉴얼 자체보다 중요한 건 훈련이란 점을 안다. 매뉴얼은 반복 훈련으로 숙지되고 그 속에서 개선된다. 진짜 매뉴얼은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어느 날 갑자기 담당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집단지성과 경험, 훈련을 통해 얻은 매뉴얼은 훌륭한 지침서가 된다. 운(運)이 아니라 시스템이 결과를 결정짓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자칫 매뉴얼 운용에 대한 안타까움이 매뉴얼 무용론으로 흘러갈까봐 두려운 이유다.

정승훈 차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