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태국 김도연 선교사] “태국 싫다” 부임 초기 아들 폭발…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치유

입력 2014-04-28 02:13


통곡하고 울면서 “태국 싫다, 다 싫다” 부임 초기 아들 폭발…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치유

우리 아이들 온유와 충성이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우리 가족은 딸 온유가 중학교 2학년, 아들 충성이가 중학교 1학년 때 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됐다. 아직 어린 나이에 태국 생활을 시작한 온유와 충성이가 어떻게 선교지에 적응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선교지 생활을 맞았다. 더구나 여러 가지 예기치 못한 사정으로 파송교회도 없이 온 터라 소속도, 신분도, 경제적 문제도 어느 것 하나 안정적으로 준비된 게 없었다.

온유는 그래도 한 살이라도 더 먹었다고 나름대로 잘 견뎌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충성이가 폭발했다. 태국에 온 지 석 달쯤 지난 어느 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파트 거실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작은 방이 2개인 아파트라 아이들에게 방을 하나씩 주고 우리 부부는 거실에서 생활했다. 잠을 청하고 있는데 갑자기 충성이 방에서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가보니 충성이가 뒹굴며 “태국이 싫다. 태국 학교도 싫고 태국 사람도 싫고 다 싫다”고 소리를 지르며 통곡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지 않아도 순간순간 선교지 생활에 힘들어하는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지낼 때였다. 선교사의 사명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을 이곳에 데리고 와서 고생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파송교회도 없이 왔으니 후원자들이 제대로 있을 리 없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라도 선뜻 해줄 수 없는 형편이라 늘 마음이 편치 못했다.

충성이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일 아닌가. 겨우 달래 눈물을 그치게 해놓고 자리에 누웠다.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꼬박 밤을 새웠다. 기도를 하는데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렸다.

“너희의 가진 문제들이 한국에 가면 해결되느냐, 너희가 어디에서 살든지 내 말을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다.”

이 말씀은 내 마음에 천둥처럼 울렸다. 우리가 한국이든 태국이든 어디에서 살든지 아무런 문제없이 살 수 있는가. 아이들을 선교지에 데려와서 이 모든 문제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에게도 사명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래, 내가 아이들을 데려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이들도 온 거야.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선교사로서도, 아버지로서도 나는 담대해졌다.

‘충성아 너는 아직 어려서 알지 못하지만 네게도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다. 너는 그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됐다. 처음에는 학교에 안 가려던 충성이가 그래도 학교에 갈 시간이 되니 스스로 다녀오겠다며 나셨다. “잘 다녀오겠지” 절로 기도가 나왔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충성이가 돌아왔다.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아빠”를 부르며 문을 두드렸다. 그러면서 지금도 귀에 쟁쟁한 그 한마디.

“아빠, 오늘 역사 시험을 봤는데 100점을 받았어요.”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붉게 상기돼 들뜬 충성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 외에 아무 말도 못했다. 하나님께서 어린 사명자의 마음을 100점으로 치유시켜 주셨다. 그 후로 충성이는 지금까지 한번도 ‘힘들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충성이는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태국인들이 그들의 자존심이라 부르는 쭐라롱껀대학교 산업디자인과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했다. 1학년을 마치고 대한민국 군에 입대해 다음 달 제대한다.

선교사들에게는 자녀들의 학비를 마련하는 일도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다. 온유와 충성이가 중·고교를 졸업하는 동안 한번도 학비를 제때에 내 본 적이 없다. 낼 때마다 조금씩 나눠 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학년이 바뀌었는데 전 학년도 학비마저 못 냈다. 딸 온유에게는 충성이보다 더 미안하고 마음이 쓰였다. 어느 때인가 시험을 앞두고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온유를 부르더니 학비를 못 내서 이번 시험을 볼 수 없다고 했다. 온유가 집에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전하기에 미안한 마음으로 위로의 말을 했다.

“온유야 학비를 제때 못 내서 다른 학생들 앞에서 창피하지.” 온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더니 한마디했다. “아빠, 정말로 창피한 건 그런 게 아니야. 우린 전혀 신경 안 쓰고 씩씩하게 다니니까 걱정하지마.”

온유는 태국교회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보더니 자기가 기독교교육을 배워서 태국 아이들을 체계적으로 잘 가르쳐보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온유는 지금 호서대 기독교교육학과 2학년이다. 태국교회에도 태국인 선생님조차 고개를 흔드는 말썽꾸러기 아이들이 있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태국 날씨 속에서도 “아이가 얼마나 귀여운데 그러냐”며 안고 다니는 온유는 분명히 좋은 믿음의 선생님이 되리라고 믿는다.

충성이에게 클라리넷을 배우던 에스라는 태국 아이가 있었다. 중학생이지만 교회에서 잠을 자는 날이면 영락없이 새벽에 일어나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우는 철부지다. 어느 날 성적표를 보니 공부를 생각보다 너무 못해 놀랐다. 그 이후 방학 때는 교회에 불러 놓고 공부를 시켰다. 영어공부 중에 에스가 문제에 답을 써 놓은 것을 보게 되었다.

책을 보니 아래의 지문을 읽고 문제의 괄호 안에 Yes or No로 답을 쓰는 문제였다. 모두 3문제였는데 에스가 쓴 답은 이랬다. 1번 문제의 답 Yes, 2번 문제의 답 No, 3번 문제의 답 or.

처음에는 설마 했는데 에스에게 물어보니 사실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머리를 쓴다고 Yes, or, No라고 차례대로 쓰지 않은 것만으로도 신통할 지경이었다.

안되겠다 싶어서 그날부터 에스를 부를 때 이름대로 ‘에스’라고 부르지 않고 ‘티능(1등)’이라고 불렀다.

‘넌 충분히 1등을 할 수 있다’라는 믿음에서였다. 멀리서도 ‘에스’라고 부르면 에스는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큰 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했다.

몇 달 후 어느 날 저녁 에스가 찾아왔다. 선교사님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다고 하면서 내 방으로 들어왔다. 에스의 얼굴은 잔뜩 들떠서 웃음이 그치지를 않았다.

“선교사님, 학교에서 컴퓨터 시험을 봤는데 1등 했습니다.” 순간 내가 얼떨떨해졌다. “정말, 네가 1등을 했어.” “네, 이번에는 컴퓨터 시험에 1등을 했지만 다음에는 다른 시험도 1등을 하겠습니다.”

기특하고 대견했다. 내 얼굴에도 웃음이 그치지를 않았다. ‘1등’이 정말 ‘1등’을 했구나.

며칠 후 저녁 기도회에 성도들이 있는 자리에서 에스를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에스에게 상을 주고 모든 성도들에게 박수로 격려를 해주도록 했다. 모두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에스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얼마 후에 에스는 정말로 영어 과목에서도 1등을 했다. 할렐루야.

이 글을 쓰는 동안 고국 한국에서 세월호 침몰 사고 소식이 들려왔다.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는 동안 변을 당했다. 우리 자식들이다. 어떤 학생은 자신은 살 수 있는 자리에까지 나왔다가 친구들을 살리겠다고 다시 죽음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떤 어른은 학생들을 살릴 수 있는 자리에 있었는데, 죽음의 자리로 만들어 놓고 자기만 살겠다고 나왔다. 손끝까지 저리도록 아프다. 이번 열방우체국에 우리 자식들의 글을 써 보내는 것이 더 아프다. 다시는 이런 눈물을 흘리지 않기를 기도한다.

김도연 선교사

△1961년 서울 출생 △2003년 서울장신대, 2005년 장신대 신대원 목회연구과정 졸업 △2005년 장기 선교사로 태국 도착 △2007년 예장통합 서울동남노회에서 목사안수 △2012년 태국 순회선교센터 창립 △현재 태국순회선교사역, 태국어성경무료보급, 태국어 전도자료 무료 보급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