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50대에 신학생 된 쌍둥이 듀엣 ‘수와 진’ 의 동생 안상진 전도사

입력 2014-04-25 18:19 수정 2014-04-26 02:36


“지독하게 운이 없다고 왜이렇게 삶이 꼬이냐고… 세번째 죽음이 닥치자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그만두고 싶은 현재의 삶을 ‘장례’하고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든 치를 이도 있을 것이다. 처음 ‘죽음’이 그의 집을 노크했을 때 지독하게 운이 없다고 여겼다. 다시 죽음이 그를 방문했을 때 내 삶이 왜 이렇게 꼬이나 한탄했다. 세 번째 죽음이 그를 데리러 왔을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제발 살려달라고, 살려주시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너를 쓰기 원한다는 하나님의 ‘사인’(Sign)이었다. 그는 살아났다. 네 번째 삶은 하나님에게 바치기로 했다.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심장병 어린이를 위해 노래하고, 아름다운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준비 중이다. 그는 앞으로 무슨 일이든 주의 부르심이라면 순종할 것이라고 한다. 1980년대 후반 인기 그룹이었던 쌍둥이 듀엣 ‘수와진’의 동생 안상진(54) 전도사의 고백이다.

‘A+우등생’ 학점 4.46, 전 강의 녹취

최근 안 전도사가 공부하고 있는 서울 서초구 방배로 백석신학원을 찾았다. 교정에는 봄꽃이 만발했다. “다음주는 중국에 선교 공연을 가고요, 그 다음주 화요일이 좋겠어요. 제가 수업 듣는 날 학교로 찾아오시겠어요? 수업과 수업 사이에 짬이 날 것 같습니다.” 인터뷰를 제안했을 때 그가 한 말이다. 안 전도사를 따라 신학교 강의실로 들어갔다.

정인찬 학장의 ‘실천신학’ 강의였다. 수업 5분 전 리더의 인도로 학생 50여명은 노래를 불렀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찬송 ‘예수 나를 위하여’였다. 백석신학원에서는 수업 전 모두 찬송가를 부른다고 한다. 예배드리듯 수업에 임하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수업이 딱딱한 건 아니었다. 정 학장의 예화에 여러 차례 웃음이 새어나왔다.

“목회자에도 다양한 스타일이 있어요. 양떼가 놀라지 않도록 인자한 음성으로 인도하는 목자가 있는가 하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양이 말을 안 들으면 채찍을 마구 휘두르는 카우보이가 있어요. 그럼 되겠어요? 이런 건 받아 적지 마세요.”(웃음) 안 전도사는 수업 내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얼굴은 정 학장에게 거의 고정했다. 손은 노트 위를 바삐 오갔다. 필기를 했다.

정 학장은 복도에서 안 전도사에 대해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칭찬했다. 그럴 만했다. 지난해 신학과 2학년까지 그의 평점은 4.5점 만점에 4.46점. 비결은 철저한 예습과 복습이다. 수업 전 공부할 내용을 살펴보고 수업 중 강의를 모두 녹취한다. 수업 후 녹취록을 만들고 과목마다 강의록을 만든다. 안 전도사가 내민 필기 노트는 정자로 일목요연했다.

“한번은 강의를 하신 교수님도 제게 강의록을 빌려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만 공부하려고 그런 건 아니고요. 필요한 친구들에게도 다 복사해서 나눠줘요. 집에서 대학생 자녀들이 저 공부하는 거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정말 열심히 하니까. 하, 하!”

그는 6개 과목을 수강하고 있다. 일주일에 세 차례 학교에 나온다. 수업이 있는 날은 집에 돌아가면 새벽 1∼2시까지 녹취를 풀고 강의록을 정리한다. 13시간 연속으로 책상에 앉아있었던 적도 있다.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느냐고 물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인데 열심히 해야죠.” 한 강의가 끝난 뒤 그는 점심 먹으러 가자고 했다. 차에서 도시락을 꺼내왔다. 그건 도시락이 아니라 ‘보따리’처럼 보였다. 나는 안 전도사를 뒤쫓아 갔다. 그는 연구동 지하에 있는 학생회실 가운데 탁자 위에 연두색 가방을 풀었다.

죽을 고비 세 번, 네 번째 삶은 ‘신학’

가방에서는 큼지막한 통이 여러 개 나왔다. 따뜻한 잡곡밥이 가득 든 플라스틱 반합, 밥 위에는 계란 프라이가 여러 개 올려져 있었다. 된장 시래깃국이 든 2ℓ 보온병, 국에서 김이 났다. 고춧가루와 간장으로 양념한 두부조림, 달콤한 멸치어묵볶음, 볶음 김치가 든 찬합. 민선용 학생회장이 가져온 파김치까지 식탁에 올려졌다. 집에서 차린 것 같은 상이었다.

“처음에는 점심을 사먹었어요. 어느 날 보니까 점심을 굶는 학우들이 있더라고요. 그날부터 아내에게 부탁해서 4∼5인분의 도시락을 싸와서 나눠먹어요.”

기자까지 6명이 안 전도사의 아내 조우진(48)씨가 싸준 도시락을 함께 먹었다. 음식이 넉넉하지 않는데도 서로 “계란 드세요” “파김치 맛있어요”라며 권했다. 식사 중 민 회장은 “졸업여행을 준비해야 하는데 협조가 잘 될지 걱정”이라고 했다. 안 전도사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 없냐”고 물었다. 인스턴트 믹스커피를 종이컵에 타 마셨다. 후식까지 먹었다.

여러 사람의 도시락을 싸오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하나님이 공동체를 이루라고 하셨잖아요. 크리스천이라면 어딜 가든지 함께 나눠 먹고 마셔야지요.”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빙긋 웃었다.

수업 시작 전 그는 학우들에게 화장품과 약을 나눠줬다. “지난주 중국 갔다 오면서 사온 거야. 화장품은 누구든지 예쁘게 해주는 거고 약은 보신용이야.” 친구들은 “중국에서 산 걸 믿을 수 있냐”며 핀잔하면서도 즐거운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강의 노트도 나눠주고 밥도 나눠먹고 선물도 나눠주는 ‘과 동기’에게 익숙한 분위기였다.

1987년 ‘새벽 아침’으로 데뷔한 수와진. ‘파초’ ‘바람 부는 거리’ ‘이별이란’ 등의 곡으로 인기를 끌었다. 89년 서울 여의도 둔치에서 괴한에게 피습당한 안 전도사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10여년 동안 3차례 뇌수술을 하는 등 후유증에 시달렸다. 식당 운영으로 재기할 무렵인 2000년 다시 간경변에 걸렸다 겨우 나았다. 2008년 형과 5집 ‘사랑해야 해’를 내 재기했지만 2011년 폐암 진단을 받았다.

“제가 신학을 공부하게 된 건 하나님의 부르심에 뒤늦게 순종한 거예요. 세 번 죽을 고비 넘기고 나서야 그게 하나님이 제게 보낸 ‘사인’인 걸 알겠더라고요. 폐종양이 없어졌다는 의사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이 세 번 살려주셨으니 이젠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가자. 신학 공부를 하자’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이듬해 백석신학원에 입학했다. 고교 졸업 후 33년 만의 공부였다.

종은 주님 뜻대로, 교회 개척

수업 사이 쉬는 시간을 이용해 진리동 옥상 하늘정원에서 대화를 나눴다. 정원으로 가면서 안 전도사는 “다음 수업 시간에 찬양 인도를 제가 해요. 늦으면 안 돼요”라고 했다. 그는 학교 자랑을 했다. “수업 전에 찬양 부르는 신학교는 저희 학교밖에 없을 거예요. 교수진도 정말 훌륭해요.”

수와진은 활동 초기부터 아픈 아이들을 도왔다. 심장병 어린이를 돕기 위해 공연을 하고 거리에서 모금을 했다. “수술 받기 전 입술이 새파랗던 아이가 심장병 수술 후 뛰어다니는 걸 보면 수술비 모금 공연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수와진은 ‘거리 공연’을 통한 모금을 하나의 문화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지금까지 어린이 800여명이 심장병 수술을 받도록 도왔다.

어린이들을 돕다 병원에 ‘빚’을 진 적도 있다. “심장병 수술이 시급하니까 우선 수술부터 받게 해요. 그러다 보니 저희가 병원에 내야 할 수술비가 무려 2억원이 넘은 적도 있어요.” 수와진은 지금도 거리 공연을 멈추지 않고 있다. 체계적인 지원을 위해 지난해 11월 형 안상수씨와 함께 사단법인 ‘수와진의 사랑더하기’도 세웠다.

왜 하나님이 세 번이나 생명의 위기를 준 것 같으냐고 물었다. “하나님이 여러 번 때려도 제가 말을 듣지 않아서 그런 건데요, 뭘.(미소) 연예인 생활하다 보면 유혹에 많이 빠져요. 제가 가수 생활하면서 하나님을 멀리했던 때가 많았어요. 식당 운영할 때도 그랬고요.” “그가 나를 단련하니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는 욥의 말이 떠오르는 얘기였다.

“폐암 진단 후 눈물 흘리면서 ‘살려 달라’고 기도 많이 했어요. 수술대에 올랐어요. 병원에서 개복했는데 암 덩어리가 없어졌어요. 의사가 ‘이런 일은 처음 본다’며 놀랐죠. 그때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던 저희 어머니까지 저희 가족 모두 하나님을 믿게 됐어요.” 그런 점에서 세 번째 ‘폐암’이라는 위기는 그에게 큰 선물로 돌아왔다.

그는 내년쯤 경기도 용인에서 교회를 개척할 예정이다. “목회를 제 마지막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요. 노래에 신학까지 시키는 뜻이 있을 거라고 믿어요. 부르시는 대로 가려고 해요. 그게 무엇이든.” 수업 시작 시간이 다가오자 안 전도사는 “학우들이 기다린다”며 바삐 강의실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에서 파초의 노랫말이 생각났다. ‘하늘이 부르는 날까지 순하고 아름답게 오늘을 사는.’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