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노트-오인숙] 애곡의 시간
입력 2014-04-26 02:17
“살려 달라고, 내 자식을 살려 달라고….” 울부짖던 어머니가 쓰러졌다. 바다를 향해 아들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부르던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내 아들은 책임감이 강해 죽어 돌아올 줄 알았다”고 담담히 말하는 어느 교사의 아버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바다를 향해 마냥 앉아만 있는 어머니. 살려 달라고 애원하다가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영혼이 구원 받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아버지.
그들의 아픔에 우리는 이해하는 척 해서는 안 된다. 섣불리 위로하려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의 고통은 인간의 말로는 이해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참담한 그들의 아픔 앞에서 인간의 무기력을 통감할 수밖에 없다. 수도 없이 많은 언어가 사라지고 우리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고작 “밥 먹어라”밖에 없다. “밥 먹어라”는 말은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밥이 넘어가지 않아도 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생명줄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힘을 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랑의 표현을 우리는 고작 그것밖에 할 수 없다.
그들이 충격적인 일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분노하고 상실감에 넋을 잃고 울부짖을 때 “울지 말라”고 해서도 안 된다. 마음껏 울고 소리칠 수 있도록 기댈 수 있게 우리의 어깨를 내어주는 일밖에 우리는 할 일이 없다. 그들이 차가워지고 적대감정을 드러내고 ‘다 너희들 때문’이라고 해도, 슬픔과 고독으로 자신을 고립시키고 우울증의 늪에 빠져 있을 때도 우리는 그 늪가에 앉아 그저 기다려 줄 수밖에 없다.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언어가 있다면 기도의 언어밖에는 없다. 그리고 식욕을 잃은 그들을 위해 죽이라도 쑤어서 먹으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제 살포시 걸어야 한다. 내 이웃이 아픈 십자가를 지고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만 잃은 것이 아니라 함께 쌓아왔던 삶을 잃었다. 함께 보냈던 시간들, 함께 나누었던 기쁨들, 함께 꿈꿨던 미래를 잃었다. 이웃은, 교회는 그들과 함께 애곡의 시간을 보내고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 그들은 슬픔의 추억을 십자가로 지고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
오인숙(치유상담교육연구원 교수·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