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순간 단 몇 줄로 결빙… 이시영 시집 ‘호야네 말’
입력 2014-04-25 02:19
“철도보수공이 망치를 들고 선로를 탕 내리치고 지나가면/ 저 멀리서도 나사들은 이를 알아듣고 어깨를 꽉 조이며 응답한다/ 텅!/ 이 소리로 기관구의 아침은 또 부산하게 시작되는 것이다”(‘기관구의 아침’ 전문)
짧은 서정시로 영원의 순간들을 포착해온 이시영(65·사진)의 열세 번째 시집 ‘호야네 말’(창비)은 맑고 투명한 서정 속에서 더욱 빛나는 강인한 시 정신을 보여준다. 길이가 짧다고 거기엔 담긴 정서마저 짧은 건 아니다. 장황한 언어로 인해 더욱 잔망스러워진 우리 시대의 시 쓰기에 전범을 보이기라도 하듯, 이시영은 시적 순간을 단 몇 줄로 결빙시키는 명징성을 드러낸다. 나아가 서정과 서사를 아우르는 독특한 감성의 어법으로 단형시, 산문시, 인용시 등 다채로운 형식을 선보이고 있는 것도 특기할 만 하다.
“여우가 마을 쪽을 향해 울면 흉사가 있다고 하는데/ 구죽죽 비 내리는 밤이면 늘 여우가 울었다/ 그곳엔 내 동생 웅식이의 두 살짜리 항아리 무덤이 있다”(‘여우골짜기’ 전문)
이시영의 시는 웅숭깊은 자기성찰이 깃든 ‘오래된 노래’이다. 현란한 수식도 없이 간결하고 명료한 일상적 언어에 녹아든 그의 시들은 묵직한 울림과 잔잔한 감동을 자아낸다. 그것을 일러 긴 여백 속 큰 울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 아버지 한때는 씽씽했으리/ 두루마기 자락 펄럭이며 휭하니 들 가운데 가로질러/ 탱자울 노란 풍류집에서 장고채 두드리며 노시다가/ 새벽이슬 훔치며 돌아오곤 하셨으니”(‘젊은 달’ 전문)
그의 시는 짧지만 냉정하다 싶을 만큼 차분한 감성과 극도로 절제된 언어로 사물의 현상과 실체를 단박에 꿰뚫어본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더없이 예리하면서도 따뜻하다. “내가 잠든 사이에도 뜨락의 귀뚜리들은/ 사력을 다해 울었구나/ 그리고 들고양이들은 또 서러운 앞발을 들고 그 이슬 속을 밤새워 달렸구나”(‘가을은 이렇게 온다’ 전문)
우리 주변의 작은 생명체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는 인식을 담은 시들도 볼만 하지만 박완서 오정희 박목월 박정만 등 그의 기억 속에 각인된 문인들과의 일화를 시로 읽는 재미는 이 시집의 덤이다. “소설가 오정희 씨가 서울 나들이를 위해 춘천 역사에 들어서면 어떻게 알았는지 금테 모자를 눌러쓴 귀밑머리 희끗한 역장이 다가와 이렇게 인사한다고 합니다./ “오 선생님, 춘천을 너무 오래 비워두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측백나무 울타리 가에서 서울행 열차의 꽁무니가 안 보일 때까지 배웅한다고 합니다./ 아, 나도 그런 춘천에 가 한번 살아봤으면!(‘춘천’ 전문)
이시영은 이렇게 썼다.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평범한 시인! 5킬로미터 떨러진 읍내 중학교 가던 ‘구례-하동’ 간 그 19번 국도가 생각난다. 버스 한대가 지나면 자갈들이 튀어오르고 먼지가 눈앞을 자욱이 가렸다. 나여, 부디 그 새벽길의 초심을 잊지 말자.”(‘시인의 말’)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