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한장희] 안전불감증이 부른 안전과민증
입력 2014-04-25 02:42
‘지하철에 불이 나 자동문이 안 열리면 어떻게 하지.’ 출근길에 갑자기 든 생각이다.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질문은 이어졌다. ‘우리 집에 소화기가 있었나. 사무실에 불이 나면 어디로 피하지.’ 역시 모르겠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 10층이 넘는 건물 안에서 저녁까지 일한다. 가끔 자가용을 가져오면 지하주차장에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로 이동한다. 별 생각 없었던 일상에 얼마 전부터 불안한 상상이 자꾸 끼어든다. 연평도 포격 사건 때 우리 동네에 포탄이 떨어지면 어디로 대피할지 고민해 본 적은 있다. 하지만 일상에서 재난과 마주칠 것이라는 가정은 안 해봤다. 지하철에 불이 나고, 다리가 끊어지고, 배가 뒤집혀도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나와 내 가족 가까이에 재난이 숨어 있다는 불길함이 느껴진다. 더 큰 문제는 상상 속에서 내가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후로 일상의 피곤함이 더해졌다. 출퇴근길에 건물 입구나 지하철 역사에 비상구 표시나 유도등이 있는지 의식되고, 버스 운전사의 작은 실수에도 신경이 곤두선다. 필자처럼 ‘안전과민증’, 일종의 노이로제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의외로 많다. 경주 리조트 참사로 아까운 대학생들이 희생된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백 명의 학생이 수몰되는 현장을 생중계로 지켜보며 생긴 불안감. 이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의식적인 ‘방어기제’가 동시에 작동한 것이다. ‘그래도 나는 괜찮겠지’라는 회피 심리를 압도할 만큼의 충격이 안전과민 반응으로 이어진 셈이다.
모두 지적하듯 불안의 근본 원인은 신뢰 결핍이다. 재난대응 시스템이 엉망이라는 걸 재차 확인한 후 자구(自求)만이 살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자신 역시 재난에 대비가 안돼 있음을 깨달으면서 불안감이 가중된 것이다.
참사가 낳은 후유증은 우울증뿐만 아니다.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몰고 온 국민들의 안전과민 증세 역시 심각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 개조’ 수준으로 시스템을 정비하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나 보다. 물론 바꿔야 한다. 대형 참사 때마다 언젠가 본 듯한 ‘데자뷰’로 느껴질 정도로 전혀 진화하지 못한 재난 대응 시스템과 컨트롤타워는 꼭 손봐야 한다. 이번만은 한때의 구호나 호들갑으로 그쳐선 안 된다는 각오로, 또 안전이 가장 높은 가치로 인식될 때까지 개조 작업이 진행돼야 한다.
안전 의식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때문에 적절한 안전조직과 지속적 투자를 통한 장기적 접근이 동반돼야 한다. 기업들도 안전사고로 인한 잠재적 손실을 손익 계산서에 제대로 반영한다는 관점에서 안전에 대한 합당한 투자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또 있다. 바로 안전 관련 규제가 제대로 이뤄져 있는지 점검, 또 점검해야 한다는 점이다. 국가나 기업이 자율안전에 도달하기 이전의 안전은 엄중한 규제 하에서 보장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따라서 규제 개혁 대상에 안전 관련 규제는 예외로 해야 한다. 안전 관련 규제를 철폐 대상으로 보는 것은 안전의 가치를 모르는 무지의 산물이다. 노후한 세월호의 무리한 운항을 가능케 했던 것도 비용절감과 효율 극대화만 추구한 전 정부의 규제 완화 때문이었다는 지적도 되새겨봐야 한다.
국민들은 이제 안전을 위해 다소의 불편함을 감내하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 정부는 이번 참사를 안전 업그레이드를 위한 반전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그 많은 무고한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한장희 경제부 차장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