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혜진] 시간 앞에 지지 말자
입력 2014-04-25 02:41
1995년 6월 29일,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현저동 꼭대기에 주저앉아 초여름 붉은 노을이 불길하게 물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온몸에 불안과 공포가 엄습했다. 친구 만난답시고 늘 지나다니던 동네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삼풍 사건은 한동안 뇌리에 아프게 박혀 있었다.
2013년 겨울, 그 당시가 배경인 인기 드라마를 열심히 챙겨봤다. 마침 애틋한 두 남녀 주인공이 삼풍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한다. 남자가 사고 현장에 있는 줄 알고 충격에 빠진 여자가 무사한 남자를 보자마자 끌어안고 엉엉 운다. 이제야 저들의 사랑이 이뤄지나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음 날 사람들과 드라마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순간에도 삼풍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랬다. 그렇게 잊어버렸다. 일상이란 거친 바다에서 시간의 흐름과 속도가 너무 거세다는 핑계를 대며 우리는 쉽게 망각했다. 과도한 욕심과 태만이, 생명에 대한 안일한 태도가, 내 자리보전을 위해 책임을 회피하는 행동이 얼마나 큰 희생과 고통을 가져오는지를. 그것이 언제고 다시 뼈아프게 되돌아올 수 있는지를 이미 삼풍 이후에도 수차례 겪지 않았던가. 그 망각과 어이없는 반복됨이 인재로 인한 대형 참사에 내성을 키우는 건 아닌지 두렵다.
진도에서 들려오는 비보에 너도나도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온통 그 이야기뿐이다. 안타깝기 짝이 없는 사고의 전모와 정부 책임자들의 행태, 부조리한 한국 사회의 축소판 같은 사안들에 모두들 가슴 치며 절망하고 있다. 2014년 4월 우리 사회에 존재해야 할 최소한의 상식과 믿음도 흙빛 바닷속에 침몰한 듯하다.
우리, 이제 세월 따위에 지지 말자. 봄날 여린 꽃봉오리 같은 무구한 아이들을 끝내 지키지 못한 우리 어른들의 무책임과 비겁함을 잊지 말자. 죄책감과 수치스러움에 고개 돌리고 싶어도 또다시 떠올리자. 가슴이 아려 와도 끝까지 기억하자. 아이들은 우리 머리와 가슴에 끝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 한순간 타오르고 마는 분노와 슬픔이어선 안 된다. 그래서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무엇이 변화되었는지 우리 서로 똑바로 확인하고 몸으로 행동하자. 그래야만, 그래야만 너무도 잔인하게 떠나보낸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속죄할 수 있다. 그것이 공포의 사투 끝에 살아남은 이들, 피붙이를 잃고 남겨진 이들을 지키는 길이다. 우리 모두를 살리는 길이다.
이혜진(해냄출판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