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한국型 재난보도 매뉴얼 절실하다
입력 2014-04-25 02:21
취재원 인권 최우선시하면서 상황별 행동지침 담아야
세월호 참사로 무너져 내린 것의 리스트에는 언론도 빠지지 않는다. 진도 팽목항의 실종자와 사망자 가족들은 며칠 전부터 취재기자들의 사진 촬영과 접근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고도 남을 만하다. 16일 사고 직후 방송과 석간신문은 이유야 어떻든 ‘학생 전원 구조’라는 초대형 오보를 냈다. 이어 17일에는 대부분 언론이 ‘잠수부 512명, 헬기 29대, 함정 171척’이라는 정부의 대대적 구조 계획을 그대로 전달했다. 그러나 실제 수색에 투입된 인력은 수십 명에 그쳤다. 가족들은 언론이 정부 입장만 보도하고 그들의 목소리는 무시한다고 느꼈을 수밖에 없다. 사건 맥락에 대한 성찰이 없는 관행적 ‘발표 받아쓰기’가 가족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이다.
이후에도 언론은 실종자 가족의 아픔과 초상권을 무시한 채 선정적 기사를 내보냈다. 사고 초기 넋을 잃거나 오열하는 실종자 가족의 얼굴에 카메라를 바짝 들이대기도 했다. 한 종합편성방송의 뉴스 진행자는 막 구조된 고등학생에게 친구의 사망 사실을 아느냐고 묻는 인터뷰를 했다. 가족을 다 잃고 혼자 구조된 다섯 살 어린아이의 이름과 얼굴을 그대로 노출하기도 했다. 피해자 가족의 입장에서 잠시라도 생각해 봤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될 행동이다.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소식을 전하는 오보도 많았다. 일부 방송은 ‘선내에 산소 공급이 됐다’고 보도했으나 곧 오보로 판명됐다. 한 종편방송은 인명구조 능력이나 자격도 갖추지 못한 자칭 민간 잠수부가 허위 사실을 말하는 것을 확인도 하지 않고 내보냈다. 정확한 취재가 이뤄질 수 없는 현장에서 속보 경쟁에 매몰되면 오보를 피할 수 없다.
한국기자협회는 지난 20일 세월호 참사 관련 보도에 대한 10개항의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이와 함께 ‘신속함보다 정확성이 우선돼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재난보도 준칙 제정 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 재난보도 준칙은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에도 제정이 추진됐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언론은 정부의 재난대응 매뉴얼이 부실하다고 비판하지만 언론으로서는 매뉴얼이 아예 없는 셈이다. 이제는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해 보도한다’는 식의 원칙뿐만 아니라 취재제한 대상, 사진 취재 방식, 포토라인을 누가 칠 것인지 등 상황별 행동지침을 만들어야 한다.
선진국 언론들은 큰 재해가 발생했을 때 원칙적으로 희생자 가족과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 참혹한 재앙을 때로는 구경거리로 만들고 마는 과도한 취재 경쟁을 자제하겠다는 합의이자 약속인 셈이다. 우리나라도 꼭 필요한 경우에는 언론사들이 공동취재단을 구성해 작성된 기사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비탄에 빠진 취재원에 대한 무리한 강요와 압박을 자제해야 할 것이다. 또한 대형 재난에 대해 전 지면과 방송시간을 온통 다 할애하는 ‘도배하기’ 식 보도도 이제는 탈피할 때가 됐다. 재난보도 때문에 다른 중요 현안에 대한 감시와 보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기자협회의 재난보도 준칙이 이런 의제들에 대한 구체적 결실을 담아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