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흥우] 불신시대

입력 2014-04-25 02:29


“지시를 따른 학생들의 피해가 더 큰 사실은 사회에 대한 믿음을 뿌리부터 흔들어”

먹먹함이 가시질 않는다. 5000만명이 동시에 똑같이 앓고 있는 이 증세가 언제 치유될지, 완치는 가능한 건지 가늠하기 어렵다. 산 자는 무심한 바다를 원망하다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통한의 시간을 곱씹는다. 이렇게 세월호 참사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용납하지 않는다.

심한 무력감과 함께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증상이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울분이다. ‘외상후 울분장애’ 증세와 비슷하다. 외상후 울분장애는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와 달리 원인이 인간적, 관습적, 법적 요소에 좌우되기 때문에 적개심으로 분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세월호 비극 후 나타난 집단적 울분장애는 사회가 정의롭지 않고, 공정하지도 않고, 신뢰할 수도 없다는 부정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선실이 더 안전하다”는 지시를 충실히 따른 학생들의 피해가 그렇지 않은 학생에 비해 극심했다는 사실은 사회에 대한 믿음을 뿌리부터 흔들고 있다. “엄마가 없을 때 옆의 어른을 따르라고 할 수 없는 세상이 됐다”는 어느 어머니의 자조가 또 한번 우리를 울린다. ‘믿음이 가능하지 않은 시대’를 주제로 오는 7월까지 계속되는 인문학 강의가 이목을 끄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누구를 믿고, 어떤 말을 들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실종자 가족 틈에 섞여 가족 행세를 한 가짜 군상을 보면서 누구나 ‘우리 사회가 이렇게 막가도 되나’하는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실종자 가족들이 명찰을 달고 다녀야 하는 세상, 블랙코미디도 이런 블랙코미디가 없다.

정보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파돼야 한다. 금쪽같은 자식들과 사랑하는 부모, 형제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세월호 참사 같은 대형 재난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정부는 신속성에만 신경을 썼지 정작 보다 중요한 정확성에는 소홀했다. 구조자, 탑승자 수를 수차례 수정하는 등 미흡한 정부의 초기 사고 대응은 실종자 가족들을 분노케 했고, 정부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게 했다. 사고 현장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삿대질을 당해도, 정홍원 국무총리가 물병 세례를 받아도 동정여론이 많지 않다는 건 그만큼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는 얘기다.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대선 공약을 무시로 파기하고, 권력형 비리나 범죄가 터졌을 때 번번이 국민적 의혹을 잠재우기엔 턱없이 모자란 꼬리 자르기 결과를 내놓기 일쑤이니 정부의 말발이 제대로 설 리 없다. 가뜩이나 정부에 대한 믿음이 떨어진 상태에서 빚어진 이번 참극은 불신 대상을 사회 전체로 확대시키는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

감내하기 힘든 대재앙을 겪고 있는 와중에 온갖 괴담과 유언비어가 판을 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신뢰지수가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되는 위험 수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정치적 이유 때문에 혹은 개인적 이득을 위해 거짓을 진실인 양 포장해 유포하는 인간 이하의 행동들이 불신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이들에게 진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사회가 투명해지기를 바란다. 그래야 신뢰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투명사회’의 역설을 지적한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도 믿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더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불신은 더욱 가중돼 개인은 고립되고, 결국에는 사회 공동체 형성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일찍이 공자가 얘기한 무신불립(無信不立)과 통한다. 세월호 비극을 겪으면서 이미 2500여년 전에 신(信)을 식(食)과 병(兵) 앞에 둔 공자의 혜안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사회의 치부는 모두 드러났다. 더 떨어질 바닥도 없다. 이번 사고를 사회의 신뢰를 흔드는 모든 병폐를 바로잡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세월호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는 길이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