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詩 절정기 관통한 정서는 기독교적 참회”
입력 2014-04-24 02:29
한국시사에서 폭 넓게 사랑받고 있는 최고의 시인 백석(본명 백기행·1912∼1996·사진)이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靑山)학원 영어사범대 재학 당시의 주소는 지금까지 알려진 ‘도쿄 길상사(吉祥寺) 1875번지’가 아니라 ‘도쿄 센다가야 정(町) 167, 조일옥(朝日屋)’이었음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백석 연구’로 지난 2월 인하대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한 시인 이세기(50)씨는 2013년 2월 한 달 동안 도쿄에 체류하면서 아오야마 학원 학적부와 동창회보 등을 뒤진 끝에 ‘영어사범회회원명부(英語師範會會員名簿)에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명부는 백석이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2년 작성됐다. 이씨는 23일 “백석 연구자인 송준씨가 백석의 도쿄 거주 당시의 주소를 길상사(吉祥寺) 1875번지라고 주장한 이후 국내의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이를 답습해왔으나 이는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는 백석의 전기적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현장답사를 통한 실증적인 문학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센다가야 167번지는 도보로 30분이면 아오야마학원에 갈 수 있는 위치로, 근처에 신주큐어원(新宿御苑)과 요요기 공원, 메이지신궁이 있는 비교적 한적한 주택가이며 헌책방 골목으로 유명한 진보초(神保町)에서도 가까운 곳이다.
백석의 기독교 체험
이씨는 “백석이 다녔던 평북 정주의 오산고보와 아오야마학원, 그리고 영어교사로 일했던 함흥 영생고보(永生高普)는 모두 기독교 미션학교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 체험은 그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정주 지방은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기독교가 주민들과 활발하게 결합되어 있는데다 이러한 특색은 그의 정신사 및 시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아오야마 학원은 정기적으로 재학생 대상의 예배를 보았다. 예배는 주로 학교 내 교회당과 대강당에서 이루어졌고 교내의 모든 공식적인 행사 식순엔 찬송가와 성경 봉독, 예배가 있었는데 입학식은 물론이고 졸업식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씨는 “백석이 1931년 5월 15일 아오야마학원 내 청학원교회(靑學院敎會)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아오야마에서는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세례 증명서나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다”면서 “다만 백석의 영어사범 동기생인 아사히 시로(旭太四郞)에 의하면 ‘백석은 학교 교회에 출석하며 선교사들과 꾸준히 접촉하여 영어 실력을 닦은 학생’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특히 바이블 클래스의 강의를 담당했던 미국인 선교사 출신의 문(Moon) 선생과 가깝게 지냈다는 증언으로 미뤄볼 때 문 선생이 백석의 신앙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아오야마에서는 교회 주보와 회보도 정기적으로 발간됐다. 백석이 입학했던 1930년 6월 22일(쇼와 5년)자로 발간된 ‘청산학원교회주보(靑山學院敎會週報)’에 따르면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15분에 일요예배가 있었으며, 오후에는 고등학부기독교청년회(高等學部基督敎靑年會)가 전도(傳道) 집회를 가졌다. 또 일요일마다 문 선생의 지도하에 ‘영어지부(英語之部)’ 모임이 아오야마학원 강당(講堂)에서 있었다. 이씨는 “아오야마 조선 유학생 대다수가 기독사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과 아사히의 증언 등을 고려해볼 때 백석 역시 아오야마 재학시절 학내 종교 활동을 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고 말했다.
아오야마학원과 서북출신 문인들
백석이 다닌 아오야마는 서북 출신의 한국인 유학생과 인연이 깊다. 주요섭(1902∼1972·중학부), 김동명(1901∼1968, 신학부 45회 졸), 김재준(1901∼1987·신학부 45회), 늘봄 전영택(1894∼1968·중학부 32회·고등학부 인문과 35회· 신학부 40회 졸), 오천석(1901∼1987·중학부) 등이 아오야마 출신이다. 정주를 중심으로 한 서북인의 주요 유학 거처가 바로 아오야마였다. 두터운 신앙심을 바탕으로 교육계몽에 눈을 뜬 서북인이 아오야마 ‘서북계보’를 형성했던 것이다. 실제로 서북 출신 유학생들은 귀국 후 기독문학에 매진했는데 이광수, 주요한, 주요섭, 전영택 등이 그들이다. 이광수는 기독교적 신앙 등을 주제로 ‘무정’(1917)과 ‘재생’(1924) 등의 작품에서 기독인을 등장인물로 내세워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대변하였다.
기독교 체험이 백석 시에 끼친 영향
이씨는 백석의 시 가운데 불후의 절창으로 평가받는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이야말로 만주 일대를 떠돌았던 탕아의 귀환에 비교될 정도로 백석에게는 지나온 삶에 대한 뼈저린 자책과 새로운 자기 갱신을 위한 신앙 고백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꿀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끝 부분)
마음 속 심금을 드러내고 있는 이 시는 마치 신앙고백을 하듯 종교적이라는 게 이씨의 주장이다. 여기서 “굳고 정한”이라는 표현은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 기독교에서 ‘굳게, 굳다, 굳센’ 등의 표현은 “굳은 반석”, “굳은 바위”, “굳은 마음”으로 통하고 ‘정(淨)하다’라는 표현은 시편 73장 13절을 포함하여 잠언 20장 9절 등에 “정한 마음”, “정한”등의 표현으로 성경 곳곳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는 또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가 죄 사함을 통해 원상을 회복하려는 갈구는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로 표현되는데 이때 ‘굳고 정한 갈매나무’는 백석에게 생명의 구원이자 부활을 의미하는 상징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이 시는 백석이 이전에 쓴 시들과 자못 다르다. 자책처럼 빈번하게 구사한 쉼표의 사용도 눈이 띄지만 무엇보다 결말부에 이르는 자기 초극의 장면은 이전의 시에서 볼 수 없는 종결 방식이다. 이씨는 “자각에 이르는 전 과정이 하나의 자기 고백적 자책이며, 소생과 치유, 부활을 꿈꾸는 신앙고백”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은 1930년대 말 만주 이주로부터 촉발된 백석만의 참회록이랄 수 있을 것이다. 백석 시에 나타난 기독교적 영향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시는 ‘힌 바람벽이 있어’(1941)이다. “하눌이 이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힌 바람벽이 있어’ 부분)
시를 읽다보면 한편의 요약된 마태복음을 읽는 듯한 종교적인 경건함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씨는 “여기서 가난은 단순하게 지시적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는 느낌을 주는데, 성경에서는 가난한 자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결핍된 자로 본다”면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는 부유함이나 재산이 없음은 물론 그날그날의 생활필수품조차 결핍된 사람이며, 정신적으로 가난한 자란 마음이 가난한 자로서 자기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겸손하게 시인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가난한 자들이야말로 조건 없이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랐고, 예수는 이러한 사람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3),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누가복음 6:20)라고 표현하면서 특히 가난한 자를 복되다고 하였다”라고 지적했다.
백석, 아오야마에 월급 50원 기부
1934년 3월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해 곧 조선일보사에 입사한 백석의 또 다른 행적은 졸업 이듬해인 1935년(쇼와 10년) 3월 25일자 ‘청산학보’의 ‘영어사범졸업생의 근황’에 소개되어 있다. 영어사범 쇼와 9년 졸업생들의 ‘청산학원창립 50주년 기념기금’ 기부자 명단에 따르면 백석은 ‘백기행’이라는 본명으로 50엔을 기부했다.
당시 영어사범 일본인 동기생들이 평균 30엔을 기부한 것으로 봐서 백석이 기부한 50엔은 큰돈이었다. 당시에 최고 우대를 했다는 1935년 조선일보 기자 초임은 50원이었는데 1930년대엔 조선은행권과 일본은행권이 1대 1로 교환되었음을 감안할 때 한 달 치 봉급을 몽땅 기부한 것이다(당시 쌀 한가마니가 3원이었으니 50원은 약 17가마니에 해당). 이는 모교 아오야마학원에 대한 백석의 자부심이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백석 누구인가
소월 이후 평북이 낳은 천재시인’이자 ‘우리 문학의 북극성’이란 극찬을 받는 시인.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졸업 후 귀국, 36년 시집 ‘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면서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재직하다 만주로 건너가 방랑생활을 했다. 해방 후 고당 조만식 선생의 러시아어 통역으로 평양에서 활동하다 58년 숙청돼 함북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치기로 일했다. 96년 사망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