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숫자의 모독
입력 2014-04-24 02:42
지난 여드레 동안 우리가 살아가는 지상은 카페리 세월호가 가라앉은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의 심연 같았고 관속 같았다. 살림이 관짝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말은 안 나오고 장탄식만 새어나왔다. 더 답답한 것은 겪지 말아야 할 것을 겪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모독. 지난 며칠간 대한민국 국민이 느낀 것은 모독일 것이다. 숫자가 인간을 모독했다. 탑승 사망 실종 구조. 네 항목으로 분류된 자막이 온종일 TV화면 상단에 붙어 있었고 앞으로도 당분간 그럴 것이다. ‘구조 174명’이라는 숫자는 사고 첫날부터 바뀌지 않았다. 정부 당국의 혼선으로 탑승자 숫자가 여러 차례 바뀌는 동안에도, 사망자 숫자가 늘어나고 대신 실종자 숫자가 줄어드는 동안에도 ‘구조 174명’은 난공불락처럼 버티고 있었다. 생사의 경계를 완강히 가로막은 ‘174’라는 마법의 숫자, 바뀌지 않는 ‘174’가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급기야 지난 주말, 생존자가 극적으로 구조될 기적이 일어날 확률이 매우 낮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텔레비전 뉴스 바깥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웬걸, 먼 곳으로 가면 세월호 참사에서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가긴 갔다. 돌아도 아주 먼 길을 돌아서 간 게 문제지만.
일단 강원도 홍천에 살고 있는 지인의 집을 방문한 뒤 시간이 남으면 속초까지 내빼 보겠다고 훌쩍 떠난 길이었다. 하지만 TV 대신 이번엔 자동차 AM라디오를 틀어놓았으니 또다시 숫자들이 사망자와 실종자 사이를 오가며 한쪽은 늘어나고 한쪽은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사망자와 실종자를 합쳐 모두 302명이 되어야 한다는 숫자 놀음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302’는 죽음의 다른 말이었다.
그렇게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운전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강원도 홍천이 아니라 춘천에 도착해 있었다. 내비게이션은 내가 언젠가 입력시킨 춘천으로 나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춘천에서 홍천으로 방향을 틀면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세월호 침몰 특보를 청취하며 화천을 향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홍천을 화천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내 삶의 내비게이션이 고장 났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망자와 실종자 숫자가 내 삶 속으로 깊게 들어왔던 것이다.
어쩌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삶이라는 내비게이션의 고장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걸 간접 경험에 의한 심리적 재난 상황이라고도 하고 국가적 대리 외상 증후군(Vicarious Trauma)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미리 알았다면 먼 곳으로 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국가적 규모의 심리적 재난사태가 미치는 영향권이 전 국토일 터인데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저 진도 앞바다의 난해(難海)속에 가라앉은 이 지난한 삶의 난해(難解)를 어떻게 풀 것인가. 실종자 인양과 장례절차가 마무리되고 책임자가 처벌된다 해도 세월호 침몰참사는 영원히 종결되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의미하는 것이 몽매한 인재(人災)가 낳은 집단적 비극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다. ‘302’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실종자와 사망자의 합산이나 통계가 아니라 요행히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산 자와 죽은 자의 모든 계량화 그 자체이다. 이때 살아 있는 우리 모두는 죽은 자의 유가족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숫자는 죽음의 무늬도 추모의 무늬도 될 수 없다. 숫자는 유가족의 슬픔을 계량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당장은 숫자가 세월호 참사의 외형이며 우리 슬픔의 껍질이다. 숫자라는 형식이 슬픔이라는 내용을 견인할 수 없는데도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숫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모순이 우리가 느끼는 모독일 것이다. 패닉 상태에 빠진 국민들을 모독감에서 풀려나게 하는 게 박근혜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임은 물론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