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함께 놀자
입력 2014-04-24 02:16
요한복음 9장 2∼7절
한국 전통 종교의 주축을 이루는 샤머니즘과 불교, 유교에는 장애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샤머니즘에서는 장애인을 보고는 귀신이 몸에 들어왔거나 누군가의 잘못 때문에 벌을 받아 생긴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전생의 업보 때문에 장애인으로 태어났다고 풀이하는 종교도 있습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가 지배했던 조선시대에는 장애인 자녀가 가문의 수치라 생각해 이를 감추곤 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어떨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말 성서에도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이라는 단어입니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소경이나 맹인이라는 말 대신 사회적 합의에 따라 시각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맹인이란 말의 맹(盲)자는 눈 목(目) 부수에 망할 망(亡) 자를 씁니다. 눈이 망했다는 뜻입니다.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장애 관련 용어에 대한 배려가 미흡해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당시의 관행에 따라 시각장애인이 눈먼 게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은 오늘날도 사라지지 않아 장애인과 그 가족을 더 힘들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참된 진리를 진리로 보지 못하고,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진리를 외치지 못하고, 손발이 있어도 섬김의 삶을 살지 못하는 자들이 장애인이라고 말씀하시며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오히려 시각장애인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침을 흙에 이겨 그의 눈에 바릅니다. 창조주의 체온을 흙에 담아 찢긴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육체적 장애뿐 아니라 멸시 당하며 생긴 마음의 병까지 치료해주신 것입니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았지만 많은 이에게 희망을 전한 고(故) 장영희 교수의 ‘같이 놀래’라는 칼럼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본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어떤 마을에 걷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톰 설리번이라는 남자아이가 있었습니다. 한 여자아이가 이웃에 이사를 왔는데, 이 아이는 톰이 휠체어를 타는 것과 공을 잘 가지고 놀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엄마에게 “저 아이는 왜 저래”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엄마는 딸에게 “네가 수학을 잘 못하듯 저 아이도 못하는 것이 있는 거야. 너와 똑같은 친구란다”라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여자아이는 톰에게 가서 “함께 놀래?”라며 말을 건넸고, 서로 친구가 됐습니다. 이야기를 소개한 장 교수는 살면서 가장 듣기 좋았던 말이 “함께 놀래?”였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주님은 사회 곳곳을 다니시며 “함께 놀자”고 청하셨습니다. 억압받는 사마리아 여인, 세리 삭개오와 마태, 창녀들, 어린아이들, 그리고 온갖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환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초청하며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빵을 떼어 주시며 직접 식탁에서 시중드는 자로 섬기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르는 공동체인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이 한 데 어울려 함께 놀기에 가장 좋은 공간이어야만 합니다. 이런 교회가 우리가 날마다 신앙고백을 하는 거룩한 공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김한호 목사 (춘천동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