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하나님은 모든 고통 안에 계신다

입력 2014-04-23 02:31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필립 얀시 지음, 이용복 옮김/규장

정말 하나님께 물어보고 싶다. "대체 우리에게 왜 이러세요?"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까?" 여객선 세월호 침몰을 보면서 떠나지 않던 질문이 마구 쏟아졌다. 참담한 심정이다. 답답하고 통탄할 지경이다. 그래서 또 하나님께 외친다. "하나님은 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이 책은 복음주의 영성의 대가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필립 얀시의 최신작이다. 저자 역시 삶 속에서 이런 질문을 반복했고 그러다보니 책을 쓰게 됐다. 그는 사건 사고의 여러 현장을 방문했다.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총격 사건, 거대한 쓰나미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은 일본,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발칸반도 사라예보 등을 찾았던 저자는 “비극적인 세 곳에서 떠오른 질문들에 자극을 받았다”고 책 서문에서 밝혔다. 그리고 연이어 터진 사건들이 있었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와 텍사스 비료공장 폭발사건, 중국의 지진과 방글라데시의 건물 붕괴, 오클라호마주에 닥친 치명적인 토네이도 같은 엄청난 재난 앞에서 그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인생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질문은 계속됐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은 분명 그 고통 안에 계셨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고. “신약성경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라고 부르는 예수님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사람의 편에 서신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일본이나 종교가 서로 간 증오의 뿌리가 된 사라예보에서도 그럴까? 그렇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증거는 예수님께서 당시 이단자로 취급받던 사마리아인들에게 보이신 태도나 병든 식구가 있는 이교도 로마인들에게 베푸신 자비이다.”(205쪽)

갈보리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때를 보면, 우리는 외견상의 패배를 결정적 승리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그분은 인간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시지 않으셨고, 심지어 악한 일을 막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 악한 의도를 갖고 저지를 일을 속량해서 선한 것으로 바꾸셨다. 즉 하나님은 자유롭고 위험한 세상의 힘든 일들을 막아주시지 않고, 대신 우리 모두와 그것들에 동참하심으로써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

이에 저자는 강조한다.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은 교회 안에, 즉 그분이 이 땅에 대리자로 파견하신 집단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라는 질문을 ‘고통의 시간에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206쪽)

저자는 해일로 파괴된 집을 재건하기 위해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일본까지 와서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을 보았다. 또 사라예보에서 프란체스코 수도회 사람들이 그리스도인과 더불어 가난한 자를 돕고 평화를 위해 일하고 있음을 전했다. 총격 사건이 있었던 미국 코네티컷주 뉴타운의 월넛힐교회는 총격에서 살아남은 초등학생들을 위한 장기적 상담 등을 대비해 기금을 모은다고 소개했다.

“고통은 고통당하는 사람을 고립시키고, 그의 자아상을 망쳐놓고, 희망까지 꺾는다. 이 세 가지를 물리치려면 누군가 그의 곁에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있다.” 저자는 그리스도인이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밝혔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더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이 있다. 저자가 밝힌 ‘위로의 방법’이다. 슬픔과 고통의 상황이 발생하면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한 말이라도 오히려 슬픔, 고통을 증폭시킬 수 있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흔히 전하는 ‘이렇게 된 데는 틀림없이 깊은 뜻이 있다’거나 ‘하나님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와 같은 말은 이미 한계 상황에 와 있는 이들에겐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세상의 비극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를 땐 먼저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느끼실까’를 생각하라고 조언한다. 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영적 진리도 잘못된 때에 말하면 상대방을 크게 자극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고난이 더 큰 선을 이룬다는 말 역시 자신의 비극을 슬퍼하며 어떻게 삶을 다시 시작할까를 고민하는 이들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처럼 위로와 치유를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슬픔에 충분히 공감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보다 더 슬퍼하십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나는 ‘왜 고통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편을 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 설명이 되지 못할 것이며, 심지어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사랑과 동정을 보이면 그들의 상처가 아물고, 마음의 고통이 치유될 것이다.”(81쪽)

우리 대한민국이 새겨들어야 할 충고가 아닐까 싶다. 세월호 침몰 현장에서 어떤 말을 한들 차디찬 바다에 사랑하는 자녀와 부모 형제, 친구를 잃은 유가족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분명한 건 ‘치유의 적’인 스트레스, 죄의식, 불안, 분노는 주변 공동체의 관심과 사랑으로 제거할 수 있다. 지금은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일 때이다. 필립 얀시는 오는 10월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 초청으로 방한해 세미나를 인도한다.

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