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세월이 켜켜이 어디까지 갔다 왔을까… 이진용 화백 개인전 ‘트렁크-68㎡’
입력 2014-04-22 02:23
“진도 여객선 침몰 참사를 지켜보면서 음식을 먹는 것조차 미안해요. 웃는 것도 그렇고요.” 오랜 시간의 흔적이 배어있는 낡은 가방 그림으로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이진용(53) 작가. 지난 주말 부산 해운대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웅크린 자세로 작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생때같은 아이들의 참변에 화가로서 애도의 마음을 담은 붓질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진도 참사가 발생하기 하루 전인 15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 갤러리바톤에서 개인전 ‘트렁크-68㎡’를 오픈했다. 전시장 한쪽 벽면(68㎡)을 빈틈 하나 없이 빼곡하게 채운 ‘트렁크 시리즈’가 눈길을 끌었다. 26개의 캔버스에 36개의 가방을 그린 초대형 작품이다. 가방의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애잔한 사연을 가진 물건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낼 것 같다.
그의 그림은 사진이나 사물을 놓고 그대로 그리는 극사실주의 작품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방의 손잡이나 문양 등은 작가의 머릿속에 있는 상상의 이미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무수히 많은 오래된 가방에 축적된 시간과 사연들을 그림으로 재구성한 것”이라며 “대상의 본질이나 사물의 진실을 표현하는 본질주의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단한 수집광이다. 동서양의 오래된 책, 가방, 악기, 도자기, 시계, 카메라, 타자기, 보이차, 침향 등 작업실을 가득 채운 수집품이 50만점이 넘는다. 동서양 그림과 골동품, 의상, 소품 등을 닥치는 대로 모으는 수집벽을 지녔던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에 비견할 만하다. “수집은 취미가 아니라 운명”이라는 그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수집품은 제 작업의 원동력이자 교과서”라고 말했다.
그의 그림과의 인연은 중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어시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 교사가 혼을 내는 대신 “잘 그린다. 소질을 잘 살려봐라”고 칭찬한 게 운명을 바꿨다. 동아대 조소과를 나온 그는 시간과 기억을 서랍에 담아내는 설치작업으로 인기를 얻었다. 스위스 바젤, 미국 시카고 등 각종 국제아트페어에서 작품이 불티나듯 팔려나갔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 회화 작업으로 전환했다. 미술의 본질이 회화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매일 한 끼만 먹으며 붓을 쥐는 손가락이 휠 정도로 하루에 20시간씩 작업에 몰두하는 그는 잠잘 때도 그림 옆에서 잔다.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영감이 떠올라 깨게 되면 곧바로 붓을 잡기 위해서다. 붓은 털이 가장 세밀한 1호 크기를 주로 사용한다.
5월 24일까지 이어지는 전시에는 가방 그림과 함께 책 그림도 선보인다. 가방에 인간이 가진 유형의 재산이 담겨 있다면 책에는 무형의 자산이 들어 있다. 임마누엘 칸트, 갈릴레오 갈릴레이, 장 자크 루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소크라테스 등의 이름이 적힌 책이 꽂혀 있는 듯하지만 이 역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속의 책들이다.
그의 작품이 각광받는 것은 단단한 필력을 바탕으로 치열하면서도 독창적인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서울옥션과 K옥션 대표를 지낸 김순응 아트컴퍼니 대표가 기획했다. 김 대표는 “이 작가는 중국의 장샤오강이나 쩡판츠처럼 국제미술시장에서 작품당 100억대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작가”라며 “향후 행보가 기대된다”고 말했다(02-597-5701).
부산=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