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제5 주유소’ 꿈꾸는 삼성토탈… 정유 4社 경계 태세
입력 2014-04-22 03:32
석유협회가 ‘삼성토탈’ 회원가입 유보시킨 사연은
지난 3일 서울 중구 을지로 롯데호텔에서 대한석유협회 정기총회가 열렸다. 총회는 안팎의 많은 시선을 끌었다. 삼성토탈의 신규회원 가입 신청 안건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1980년 9월 출범한 석유협회 회원사는 정유사 4개뿐이다. 국내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S-OIL), 현대오일뱅크가 그들이다. 합쳐서 매출액 200조원을 넘다드는 이들을 제외하고 이제껏 석유협회에 가입한 기업은 없다. 전용원 협회장을 비롯해 4개 정유사 최고경영자(CEO)는 이사 자격으로 총회에 참석했다. 이들은 별다른 격론 없이 삼성토탈의 회원 가입을 보류키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협회 측은 총회 종료 직후 자료를 내고 “기존 회원사와 성격이 다른 삼성토탈이 회원으로 가입했을 때 예상되는 여러 사항에 대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추후 재논의키로 했다”고 밝혔다. 삼성토탈은 진한 아쉬움을 표시했다. 부결이 아니라 일단 보류라고 위안했지만 텃세가 높다는 점을 절감했다. 삼성토탈 측은 다음번 정기총회에서 좋은 결론이 나길 기대한다는 입장을 냈다.
삼성토탈은 왜 석유협회 가입을 간절히 원하는 걸까. 이 회사는 2003년 삼성종합화학과 프랑스 토탈그룹이 절반씩 투자해 만들었다. 지난해 매출 7조8000억원 중 6조원이 석유화학 분야에서 나왔다. 굳이 정유사 텃밭인 석유협회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 석유화학회사들은 별도로 석유화학협회가 있다.
그럼 석유협회는 제 발로 찾아온 기업에게 왜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협회는 회원사가 많아지는 것을 반긴다. 목소리에 더 힘이 실릴 뿐만 아니라 재정이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석유협회와 삼성토탈의 ‘물음표’ 달린 행보의 이면에는 복잡하게 얽힌 방정식이 숨어있다. 산업계 관계자는 21일 “알뜰주유소를 중심에 두고 보면 얽히고설킨 서로의 불편한 관계가 이해된다”고 말했다.
◇알뜰주유소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정유업계는 지난해 불황으로 최악의 실적을 냈다. 석유제품 소비가 바닥을 치다보니 현대오일뱅크를 제외한 정유 3사가 2년 연속 정유부문 적자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특히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요국의 석유제품 수요 감소 영향으로 정제 마진이 급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알뜰주유소는 눈엣가시다. 경쟁을 활성화해 기름값을 낮추겠다는 의도로 정부가 추진한 알뜰주유소는 2011년 12월 1호점이 등장했다. 각종 운영비용을 낮추고 여러 정유사의 제품을 섞어 팔아 가격 경쟁력을 갖췄다. 알뜰주유소는 농협이 운영하는 NH알뜰주유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운영하는 고속도로 알뜰주유소, 자영 알뜰주유소 3종류가 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자영 알뜰주유소의 휘발유 가격은 전국 평균가격보다 ℓ당 40원, 경유는 50원 가량 싸다. 2012년 12월 말에 844곳이었던 알뜰주유소는 지난해 말 1031곳까지 늘었다. 전국 주유소의 8.1%에 이른다.
알뜰주유소에서 파는 석유제품은 삼성토탈, 현대오일뱅크, 에쓰오일이 공급하고 있다. 삼성토탈은 2012년 7월부터 알뜰주유소에 납품하기 시작했다. 삼성토탈의 알뜰주유소 공급 물량 점유율은 2012년 말 7%에서 지난해 말 30%, 최근 40% 수준까지 크게 증가했다. 알뜰주유소가 이른바 ‘삼성 주유소’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뿐만이 아니다. 알뜰주유소가 급성장하면서 SK에너지,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에쓰오일 순인 국내 정유시장 지배 구도에도 균열이 생겼다. 3위였던 현대오일뱅크가 알뜰주유소를 등에 업고 지난 1월 2위로 올라서기도 했다. 2월에는 GS칼텍스가 2위 자리를 탈환했다.
◇‘제5정유사’를 꿈꾸다=삼성토탈은 일반 정유사와 달리 원유 정제시설이 없다. 합성수지제품과 파라자일렌 등 석유화학제품을 생산한다. 다만 기초 원료로부터 석유화학제품을 뽑아내는 과정에서 에너지 제품(LPG, 항공유, 선박유, 휘발유, 솔벤트 등)이 부산물로 나온다. 삼성토탈은 현재 월 12만5000배럴의 에너지 제품을 알뜰주유소에 공급하고 있다. 이달부터 반제품 형태였던 휘발유를 완제품으로 납품하고, 하반기 경유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삼성토탈은 에너지 부문 매출 비중을 최대 50%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이쯤 되자 삼성토탈은 석유협회 가입을 통한 명실상부한 정유사 지위 인정을 바라고 있다. ‘제5정유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는 얘기다. 삼성토탈 관계자는 “협회에 모이는 정보(수급상황, 해외동향 등)가 상당하다. 이런 정보를 얻고 다른 정유사와 교류하면서 제 목소리를 내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정유업은 대표적인 규제산업, 허가산업이다. 정부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는 분야여서 석유협회에 가입해 정부와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삼성 주유소’를 둘러싼 복잡한 시선=정부는 알뜰주유소를 중심으로 경쟁이 치열해져야 소비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다. 2011년 4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기름값이 묘하다’는 발언 이후 정부는 일관되게 ‘소비자에게 싸게 기름을 공급하라’는 목표를 밀어붙이고 있다. 이로 인해 정부는 삼성토탈의 석유협회 가입 등에 호의적이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주도한 정유업계 정책간담회에 삼성토탈 박성훈 부사장이 참석할 정도다.
반면 기존 정유 4사는 정부의 행보가 마뜩찮다. 인위적인 시장 개입으로 유통질서가 무너졌으며 정유업계는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고 본다. 또 실적 악화가 계속되는 만큼 막강한 자금력을 갖춘 삼성이 정유업에 뛰어드는 것을 잔뜩 경계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단순하게 실적 악화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있다. 정유업계는 경쟁력 훼손을 가장 우려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소비자에게 더 싼 값에 제품을 공급한다는 것은 좋은 취지다. 다만 적자를 내면서 석유제품을 팔다보면 기업 경쟁력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다”면서 “해외자원 개발에 나서려면 자금력 등에서 탄탄해야 하는데 우리는 어느 하나 충분하지 않다”고 토로했다.
한국주유소협회는 알뜰주유소에 특히 부정적이다. 이들은 “석유제품 유통시장은 충분히 가격경쟁이 이뤄지고 있는데도 정부가 세금으로 알뜰주유소를 지원하고 수의계약을 통해 삼성토탈 제품을 사주면서 특혜를 주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나마 다행은 각자가 볼멘소리를 하지만 핏대를 올리며 싸우는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복잡하게 이해관계가 얽혀 있음에도 서로가 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정부는 울산·여수에 동북아 오일허브를 구축하는 프로젝트에서 답을 찾는 중이다. 오일허브는 석유를 정제·가공·저장할 수 있는 대규모 시설을 기반으로 석유 거래 관련 물류와 금융서비스 등을 제공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국제 중심지다. 미국 걸프만과 유럽 ARA(암스테르담·로테르담·앤트워프), 싱가포르가 세계 3대 오일허브다.
정부는 오일허브 프로젝트에 정유 4사는 물론 자금력이 풍부한 삼성의 참여를 바란다. 정유 4사도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오일허브 참여, 사업 다각화 등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삼성토탈의 석유협회 가입을 ‘부결’이 아닌 ‘보류’로 남겨둔 배경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현재처럼 비좁은 시장에서는 삼성토탈의 진입이 시장 참여자 모두를 어려움에 빠트릴 수 있지만 오일허브 등으로 판이 커지고 달라진다면 상생이 가능하다”며 “알뜰주유소에 대한 과도한 지원을 줄이면서 정유산업 전체의 틀을 키운다면 기업도 살고, 소비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찬희 기자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