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형 칼럼] 죽음의 죽음

입력 2014-04-22 02:15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던 중세 시절,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매일 장례의 종소리가 유럽 전역 교회에 퍼졌다. 그때, 크리스천들은 죽음은 공적 사건이며 교회에 주는 교훈이라는 사실을 매순간 기억했다. 죽음의 문제를 천착한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에 따르면 죽음은 공간과 시간을 엄숙하게 바꿔 놓았다. 애도는 집단 전체의 일이었다. 죽음과 애도의 프로세스를 통해서 사람들은 반드시 교훈을 얻었다.

우린 가장 길고, 고통스러운 사순절을 보냈다. 부활의 아침, 웃으며 옆사람들에게 ‘해피 이스터(Happy Easter)’라고 말할 수 없었다. 진도 앞바다에 잠긴 우리 아들, 딸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기에. 가족들의 고통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겠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 참혹한 잔상으로 인해 괴로워했을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나의 하나님, 온 종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밤새도록 부르짖어도 모르는 체하십니다.” 시편 22편에 나오는 다윗의 통절한 노래는 우리의 심정을 대변한다. 우리 입에서 나올 단말마와 같은 한마디가 있다. “주여, 왜?” “주여, 도대체 당신은 왜?”

지금 거대한 죽음이 우리를 덮고 있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무수한 공적 죽음을 사적 교훈의 기회로 삼았던 유럽의 크리스천들과 같이 우리 역시 지금 이 이해되지 않는 죽음을 통해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 “여기엔 분명 메시지가 있다!”는 신적 자각을 해야 한다. 세월호 침몰과 의로운 자들의 죽음을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통절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모두가 책임져야 한다. 고난주간을 보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제 침몰한 세월호와 많은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고백해야 한다. “저 아이들의 죽음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세월호의 침몰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교회는 이 사건 속에 깃든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고, 사람들에게 던져줘야 한다. 이 땅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움, 슬픔이 이번 사건에 투영되어 있음을. 그래서 이미 수장되어 사라져 버렸어야 할 우리를 대신해 저 죄 없는 학생들이 희생되었을 수 있음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무조건 회개의 자리로 나가야 한다. 오직 이 땅을 치유하실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며.

더불어 교회는 죽음의 죽음을 선포해야 한다. 시꺼먼 죽음이 우리를 뒤덮고, 살아 있는 자들을 조롱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죽음은 이미 패했다! 죽음은 죽었다.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의 온 삶을 통해 죽음의 죽음을 선포하셨다. 그래서 우린 죽음에게 이렇게 담대히 물을 수 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유족들에겐 함께 슬퍼하는 것 이상의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말을 하고 싶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분이 당신들의 귀하디 귀한 아이들도 결국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길이 끝나는 그곳에서 죽음의 죽음을 선포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이들을 기다리실 것이라고. 우린 결국 다시 만날 것이라고….

죽음은 지독한 현실이며 상처는 고통스럽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 일하신다. 이 죽음에서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 필사적으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죽음의 죽음을 선포하면서….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 소장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