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 외상 증후군’에 빠진 대한민국… 아이들 영상 뇌리에, 온 국민 심리적 재난 상황
입력 2014-04-21 04:01
세월호 침몰 이후 닷새간 기적의 생환을 기도했던 대한민국이 ‘심리적 재난 상황’에 빠졌다. 마침내 구조대가 선체 내부에 진입했지만 기대했던 생존자 대신 안타까운 시신만 대거 발견했다. 육체적·정신적 한계상황에 놓였던 실종자 가족들은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다. 이를 TV로 지켜본 국민들은 간접경험 트라우마에 맞닥뜨렸다.
고려대 의대 김정일 교수는 “지금 우리는 국가적 ‘바이케어리어스 트라우마’(Vicarious Trauma)를 겪고 있다”고 진단했고, 최태산 전국재난심리지원센터 연합회장은 “온 국민이 타격을 입은 국가 규모의 심리적 재난 사태”라며 “대책이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객실에서 시신들이 나온 20일 전남 진도실내체육관과 팽목항에선 실종자 가족 수십명이 실신해 병원에 실려 갔다. 가족들은 회의를 열고 “정부 대응을 못 믿겠다. 대통령에게 직접 말하겠다”며 청와대로 가기 위해 버스를 대절했다. 가족 70여명이 체육관에서 나와 버스를 타려 하자 경찰 100여명이 가로막아 3시간여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실종자 가족들은 식음을 전폐하고 생존 소식을 기다리다 극한 상황에 내몰려 있다. 정신보건 전문가들은 이들이 깊은 절망과 분노, 배신감 등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에 극단적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부는 격한 분노를 쏟아내는 형태로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실종자 가족뿐 아니라 수백명이 수몰되는 참사를 생중계로 지켜본 일반 국민들의 트라우마도 매우 심각하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TV 생중계를 통해 어린 생명들이 바닷속으로 조금씩 가라앉는 현장을 많은 사람이 지켜봤다. 이 장면은 반복적으로 비춰져 시청자들의 트라우마를 키웠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 교수는 “많은 이들이 TV 중계를 보며 배 안의 참혹한 광경을 상상하게 됐다. 상상이 현실에 근접하면 직접 목격한 듯 뇌리에 각인돼 오래 남는 대리 외상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실종자 가족이나 주변인들에게 국한된 충격이 아니라는 얘기다.
국가 규모의 심리적 재난에 가장 기본적인 사회안전망까지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하는 전문가도 많다. 국민이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을 불신하게 되면서 국가의 신뢰 기반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감수성이 풍부한 청소년들, 그리고 자식을 눈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잃는 걸 간접 체험한 모든 학부모에게 대리 외상이 가해졌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강력한 불신의 벽을 만들고 있다”며 “정부는 이 상황을 국가적 심리 재난으로 받아들이고 대응해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을지대 최삼욱 교수는 “대리 외상을 줄이기 위해 재난방송 등 자극적인 정보를 접하는 일을 최소화하고 팩트 위주로 필요한 정보만 얻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Key Word : 대리 외상 증후군
Vicarious Trauma. 사건·사고의 당사자가 아닌데도 간접 경험으로 인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빠지는 현상. 간접 외상으로도 불린다. 주로 참혹한 사건·사고를 자주 접하는 경찰관이나 소방관, 그 피해자들을 대하는 간호사나 심리치료사들에게 나타난다.
이도경· 황인호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