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신창호] 대통령 개인기로만 해결되나
입력 2014-04-21 02:34 수정 2014-04-21 10:34
세월호 침몰 사고 이틀째였던 지난 17일 박근혜 대통령이 실종자와 사망자 가족들이 머무는 전남 진도체육관을 찾았다. 여기저기서 “여기가 어디라고 얼굴을 내미느냐”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삿대질을 하는 이도 있었다. 배가 가라앉아도 제대로 구조에 나서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던 정부에 대한 이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던 상황이었다.
박 대통령이 제일 먼저 한 얘기는 “누구보다 애가 타고 미칠 것 같은 가족들에게 구조 상황을 알려줘야 할 것 아니냐. 현장을 즉각 알 수 있는 사람을 배치해 가족들 요청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라”는 말이었다. 한 학부모가 느려터진 구조작업을 지적하자 다른 학부모는 “XX놈들”이라며 거친 욕설까지 내뱉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박 대통령에게 뭔가 속삭였다. 잠시 후 박 대통령은 김 실장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아마도 “분위기가 안 좋으니 이제 그만 대화하시라”는 김 실장 메시지를 거절한 듯한 행동이었다.
박 대통령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조건 가족들을 진정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순간에는 자식을 침몰된 배로부터 구해내려는 학부모와 똑같은 심정인 듯했다. 한 학부모가 일어나 “지금 한 약속이 잘 지켜지는지 제가 휴대폰 번호를 드릴 테니 오늘 밤 제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주십시오”라고 했고, 박 대통령은 그날 밤 진짜로 전화를 걸었다. 실종됐음에도 애초 구조자 명단에 올랐던 안산 단원고 2학년 문지성양의 사연은 그렇게 알려졌다. 대통령이 유가족과 직접 통화를 주고받을 때까지도 사고대책본부는 버젓이 실종자를 구조자로 둔갑시켜놨던 셈이다.
대한민국에선 수많은 대형 사고가 벌어졌다. 갑작스레 화염에 휩싸인 지하철 때문에 샐리러맨과 학생들이 숨진 적도 있고, 또 다른 페리호가 침몰해 수백명이 수장되기도 했다. 아침 시간 한강 다리가 무너져 내린 일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박 대통령처럼 사고 현장에 직접 얼굴을 내민 역대 대통령은 지금까지 없었다.
박 대통령이 진도에 간 것은 욕먹지 않겠다는 정치적 계산에 따른 행보는 아니었던 듯하다. ‘항의를 받고 봉변을 당하더라도, 나 또한 어이없는 사고에 망연자실한 당사자들과 같은 눈높이에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 게 아닐까.
박 대통령이 직접 실종자 가족들을 만났다고 해서 인재(人災)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슬픔이 수그러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 대면 뒤 구조작업 속도가 빨라지리라 잔뜩 기대를 걸었던 실종자 가족들은 더 화가 난 상태다. 세월호 탑승 인원과 구조자 명단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관계 부처의 졸속 행정이 오롯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고대책본부는 여전히 허둥지둥하는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다.
정부로서는 오히려 박 대통령과 실종자 가족의 만남이 뼈아픈 일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다. 이번 같은 대형 사고에 대처하는 체계적인 매뉴얼이 없다는 사실이 노출돼서다. 일각에선 “보다 더 강력하게 구조작업을 독려해야 할 대통령이 현장방문 외엔 별로 한 게 없지 않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박 대통령의 행동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도 최고 통치자가 국민 ‘눈높이’에 맞추지 않으면 국민으로부터 나온 권력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는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눈높이는 박 대통령의 ‘개인기’로 해결될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다. 안전한 삶이 보장되는 국가에 대한 기대, 그리고 어떤 큰 사고라도 국가가 나서서 피해를 최소화할 것이라는 기대로까지 말이다.
신창호 정치부 차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