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러시아 나홋카 박광배 선교사] 1991년 한국서 쌀 보내주자 “식량문제 해결” 온 도시가 들썩

입력 2014-04-21 02:59 수정 2014-04-21 20:46


구호품으로 도착한 사랑의 쌀

1991년 러시아는 생필품이 턱없이 부족했다. 우리 집도 주식인 쌀을 구할 수가 없어 애를 태워야 했다. 매일 쌀을 구하기 위해 가게 이곳저곳을 돌았다. 식량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본부에 도움을 청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먹을 양식이 부족한 러시아에도 사랑의 쌀을 나눠 달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답신이 왔다. 담당국장이 러시아 현장을 방문하고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처참했던 러시아 상황을 심각하게 본 담당국장은 ‘컨테이너 하나로는 부족하다.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쌀을 보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쌀을 가득 실은 10개의 컨테이너가 나홋카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 쌀을 누가, 어떻게 분배할지가 문제였다. 나는 쌀 분배에 있어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첫째, 구호물자로 도착했으니 러시아인들에게 돈을 받지 않는다. 둘째, 선교사가 직접 나누어 주면 다음에 또 구호물자를 요구할지 모르니 나는 하나님 말씀만 전하고 쌀은 시청에 맡기자. 셋째, 이 일로 시청에 어떤 대가도 바라지 말자.

아니나 다를까 쌀이 도착하자 사방에서 난리였다. 신문과 방송은 ‘한국에서 쌀이 도착해 얼마간 우리 도시의 양식문제가 해결됐다’는 내용을 연일 보도했다. 도시가 시끌벅적해졌다. 시청은 내게 쌀을 얼마든지 줄 테니 필요한 양을 말하라고 했다. 하지만 처음 결정대로 나는 구호품 배분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시청은 각 지역의 연금자와 참전용사들에게 쌀을 정확하게 분배했다. 담당자는 수혜자의 이름과 수량을 일일이 기재해 10권 분량으로 정리한 노트를 내게 가져왔다. 주변에선 이 분위기를 타 시청에 아파트를 요구하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정부에 개인적으로나 교회 이름으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 일 이후 정부는 선교하러 찾아온 동양인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귀빈 대접해 주었다. 시장과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는 핫라인도 만들어 줬다. 그리고 우리 교회 관련 행정처리 전담자로 무히나 부시장을 배치해 줬다.

하나님은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두려움과 염려, 열등감을 사랑의 쌀을 사용해 없애 주셨다. 이때 나는 국력이 선교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뼛속 깊이 알게 됐다. 당시 후원에 동참해 주신 분들과 담당자 분들께 러시아 모든 수혜자들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문서선교의 힘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나는 출판사에서 일하며 신학공부를 했다. 이때 나는 책이 선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됐다. 러시아 정부에 쌀을 기증하면서 여러 번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신문사 사장과도 인사를 나눴다. 문서선교의 힘을 알던 난 내친 김에 신문으로 문서전도를 하고자 했다.

신문사 사장은 이런 내 생각에 대환영이란 견해를 보였다. 매주 토요일 신문에 설교를 싣고 하단엔 예배 시간과 장소도 나가니 교회를 알리는 데 이만한 장이 없었다. 신문설교는 믿지 않는 자들뿐 아니라 비밀리에 믿음을 지키던 러시아 지하교회 교인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믿지 않는 자들은 신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개혁개방으로 나라에 큰 변화가 오는 구나. 어떻게 신이 없다던 나라에서 외국 목사의 이름으로 신문에 설교가 실린단 말인가?” 구소련 시절 핍박으로 숨어서 예배드리던 지하교회 교인들은 이 설교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좋은 기회가 됐다. 러시아 극동의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이는 내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도 선교가 가능하다는 확신과 믿음이었다.

신문을 보고 많은 이들이 교회를 찾았다. 이들은 설교를 유심히 듣고 기록하는가 하면 설교 중에 질문도 했다. 전도 집회나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형식에 매이지 않고 예배를 진행했다. 질문이 있으면 답하는 식으로 예배를 드리는데 이 또한 러시아인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줬다.

지금도 러시아 정교회는 고대 슬라브어로 예배를 드린다. 그래서 예식에 참석만 할 뿐 구체적으로 다 알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예배가 끝나기를 조용하게 기다린다. 이것이 이들의 예배 전통이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누구나 알아듣는 말로 설교를 하니 매우 좋아했다. 더 놀랍게 생각한 건 목사가 찬양을 한다는 것이다. 우렁찬 목소리로 찬양하자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양이 참 좋고 은혜롭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이때 예배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일일이 적는 이가 있었다. 알고 보니 북한영사관에서 파견한 러시아 경찰이었다. 사복을 입고 성도로 위장한 그의 임무는 모든 예배를 글로 작성해 보고하는 것이었다. 북한영사관은 한국에서 온 젊은 선교사를 목사로 위장한 고정간첩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예배마다 맨 앞자리에서 설교 내용을 작성해 북한 영사관에 보고하던 그는 시나브로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내게 본인이 이런 임무를 띠고 설교를 들었음을 고백했다. 나는 당당했고, 또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그분에게 ‘더 적극적으로 자세히 기록해 보고해도 괜찮다’고 격려했다. 현재 그는 주일학교를 섬기는 신실한 교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헌금은 하나님의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자 문제가 생겼다. 예배 장소가 비좁았던 것이다. 교회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주파송교회에 말씀드리자 서울남교회 박원섭 목사와 이일남 장로, 이창수 장로가 러시아로 급히 들어왔다. 현장을 본 이들은 교회건축비로 10만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로서는 정말 엄청난 금액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 소식을 성도에게 전했다. 성도들이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온 도시에 ‘선교사에게 10만 달러나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사업가들이 내게 몰려들었다. 이들은 서로 자기 사업에 투자하라고 제안했다. 투자하고 불어난 돈으로 훨씬 더 많고 큰 교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내 마음은 똑같다. 헌금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 헌금은 건축을 위한 것이었다. 그때 투자를 제안했던 사업가 가운데 거부가 된 이가 있다. 고려인인 그는 호텔사업과 자원개발에 돈을 투자해 수천억에 달하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한국을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가끔 그분을 만나면 속이 매우 불편했다. 나는 일반석에 있는데 비즈니스 석에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후회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사업 제안을 거절한 게 잘한 것인지 내적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15년 연속 성장가도를 달리던 이 그룹의 임원진이 어느 날 모두 외국으로 도주했다. 언론엔 이 그룹이 어떻게 회사를 키웠으며 무엇을 했는지가 대서특필됐다. 알고 보니 러시아에서 제일 큰 컨테이너 부두가 있는 나홋카에서 세관장과 직원들, 이 그룹의 임원이 한통속이 돼 밀수로 돈을 벌어들인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선교사, 러시아에서 밀수하다 도주’란 제목이 신문과 방송을 연일 장식한다면 어떨지 생각해보라. 러시아 선교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은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이들은 ‘50대 50으로 수익을 배분하자’고 제안했었다. 이를 수락했다면 아마 수천억대의 부자가 됐으리라. 그런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나님은 재앙을 피하게 해 주셨다. ‘헌금은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라’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나를 보호해 준 것이다. 여전히 나는 사업제안을 했던 분들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기에도 빠듯한 일개 선교사다. 그럼에도 행복하다.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는 것 하나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나홋카 박광배 선교사

박광배 선교사 약력 △1958년 경북 예천 출생 △86년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2009년 미국 리폼드 신학교 박사 △91년 소련선교회 파송으로 러시아 연해주 나홋카 현지인 사역 시작 △91년 나홋카예수사랑교회 설립 후 로마노브카, 프랄로브카를 비롯한 연해주 농촌지역 5곳에 개척교회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