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영서 (6) 야쿠자 방해에도 ‘노점 꽃장사’ 7호점까지 대성공
입력 2014-04-21 02:06
일본 번화가에는 여러 노점 장사가 많은데 유독 꽃장사만 없었다. 꽃은 냉장 보관을 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젊은 커플들이 무척 많이 다니는 길목이라 꽃다발이 잘 팔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난 유리공장에서 밤 10시까지 일하고 곧바로 꽃집으로 가서 마무리 청소를 해주면서 꽃꽂이를 배웠다. 장미는 가시를 반드시 정리해야 하고, 백합은 수술을 미리 떼어내야 하는 등 기초적인 것부터 예쁘게 포장하는 법, 부케 만들기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이제는 리어카를 장만하고 자재비 및 꽃값 등에 드는 투자비 25만엔이 필요했다. 내게 그 정도 큰 금액을 투자해 줄 사람은 없었다. 내가 믿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기도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제 길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 25만엔을 투자할 천사를 보내주세요. 도와주세요.”
가끔씩 인사를 하며 알고 지내던 요쿠르트 파는 누나가 있었다. 제주도 분으로 열 살 손 위여서 가끔 일을 도와드리곤 했는데 누나가 내게 투자할 테니 나중에 이자를 쳐서 갚으라고 했다.
신주쿠역 동문 출구에서 시작한 장사는 예상대로 잘됐다. 데이트하러 온 남자들이 역에서 나오면서 꽃을 사가고 퇴근하는 주부와 젊은 여직원들이 퇴근하며 꽃을 사갔다.
난 아예 유리공장도 그만두고 여기에만 매달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야쿠자들이 누구 허락받고 장사하느냐고 행패를 부렸다. 몽둥이로 맞아 실신까지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건 나는 더 물러날 수 없었다. 그저 깡다구로 행패를 당한 다음날도 리어카를 끌고 꽃을 팔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나를 괴롭히는 야쿠자 조직이 3곳이나 되었다. 나는 가장 힘이 센 듯한 이들에게 통역을 대동해 담판을 지었다. 매달 4만엔을 주는 대신 일체 간섭하지 않고 보호해 주는 조건을 달았다.
새벽4시에 일어난 나는 꽃 경매시장으로 달려가 그날 쓸 꽃을 산 뒤 돌아오면서 교회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아침을 먹고 어학원에서 공부를 한 뒤 꽃을 만들어 거리로 나가 팔고 돌아오면 12시가 훌쩍 넘었다.
우리나라는 ‘어버이날’이 있지만 일본에는 ‘엄마의 날’이 있고 역시 카네이션을 달아준다. 전날 한국식으로 꽃을 잘 만들어 판매를 시작했는데 꽃바구니까지 46만엔의 큰 매출을 올렸다. 돈을 세면서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나는 한국 유학생을 고용해 내 장사를 맡기고 꽃집 2호점을 열었다. 이어 오피스빌딩이 밀집된 거리에 3호점을 열었는데 모두 장사가 잘됐다. 꽃을 많은 양을 한꺼번에 사니 더 저렴하게 가져올 수 있었고 꽃바구니 만드는 것도 전문가에 맡겼다. 이렇게 7호점까지 낸 나는 이제 유학생이 아닌 사업가로 변해 있었다.
신주쿠 중심가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고급오피스텔 10층으로 이사했다. 어학원 코스를 마친 나는 비주얼아트스쿨에 들어가 인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비자를 연장하려면 학원을 다녀야 했다.
그런데 내가 발로 뛰지 않고 맡겨 놓는 장사는 한계가 있었다. 나 역시 생활에 여유가 생기니 삶이 느슨해지고 기도도 절박해지지 않았다. 더구나 한국을 떠나 외지에서 오랫동안 치열하게 살다보니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있었다. 신경을 안 쓰고 의욕도 떨어지니 꽃가게를 하나 둘 접게 되었고 여기에 허리통증이 재발해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이제 너무 힘들어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나님, 제가 일본에서 많은 부분을 배우고 느끼고 사업까지 했습니다. 이제 한국에 가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세요.”
다 정리하고 한국행 비행기로 오르는 내 마음은 시원섭섭했다. 한국을 떠난 지 정확히 2년4개월 만에 인천공항에 다시 내렸다.
정리=김무정 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