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토크] 느림의 과학

입력 2014-04-19 02:24

프로야구 투수임에도 공을 아주 느리게 던지는 신인선수가 있었다. 공을 빠르게 던지는 다른 선수들을 보며 자신도 구속을 올리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자 이 선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2009년 프로에 입문한 후 무명으로 지내다가 지난해 갑자기 두산의 최고 히트상품으로 떠오른 유희관 선수 얘기다.

프로야구계의 통념상 시속 140㎞ 이하의 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유희관이 힘을 다해 던지는 속구는 135㎞도 채 되지 않는다. 그가 던지는 슬로커브는 76㎞에 이를 만큼 느리다. 이처럼 느린 공으로 그는 지난해 10승 투수가 되었으며, 지난 15일에는 삼성을 상대로 최고의 호투를 펼쳤다. 깜짝 성적일 거라는 애초의 예상을 깨고 그는 올해도 좋은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그는 당당히 말한다. “신은 공평하다. 내게 구속을 주지 않은 대신 좋은 제구력을 주셨다”라고.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에서도 느림을 생존전략으로 내세운 동물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포유류 중 가장 느린 동물로 알려진 나무늘보다. 시속 0.9㎞의 속도로 움직이는 나무늘보는 근육이 적어서 에너지를 적게 사용해 조금만 먹고도 나뭇가지에서 오래 버틸 수 있다. 이 동물을 잡아먹을 포식동물의 눈에는 그 같은 느린 움직임이 잘 포착되지 않아 그냥 지나치게 마련이다.

북극해에 서식하는 그린란드 상어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물고기다. 몸길이가 3m인 이 상어의 헤엄치는 속도는 나무늘보와 비슷한 시속 1㎞에 불과하다. 꼬리지느러미가 좌우로 한 번 왕복할 때 걸리는 시간이 7초라고 하니 얼마나 느림보인지 짐작할 수 있다. 나뭇잎을 먹고사는 나무늘보는 사냥 걱정이라도 없지만 포식동물인 이 상어는 그처럼 느린 속도로 과연 어떻게 사냥을 할까. 이 상어의 먹이는 자신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헤엄치는 바다표범이다. 그 해역에 사는 바다표범은 북극곰을 피하기 위해 물위에서 잠을 자는 습성이 있는데, 바로 그때 느린 속도로 조용히 다가가 사냥한다.

빠르게 진화하는 박테리아 종보다 느리게 진화하는 박테리아 종이 결국에는 개체군의 지배적 지위를 차지한다는 사실도 미국 연구진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돌연변이가 빠를수록 그로 인한 유전적 변화의 이점을 더 많이 누릴 텐데 왜 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일까. 그 이유는 빠른 돌연변이가 후에 나타날 더 강한 돌연변이 유전자의 탄생을 막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느림의 미학이라기보다 느림의 과학이라 할 만하다.

이성규(과학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