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흥우] 노래의 역사성
입력 2014-04-18 03:00
“…압제자의 피 묻은 깃발이 우리를 노리고 휘날린다. …사나운 적들의 고함소리가 바로 우리 가운데 쳐들어와 우리 아내와 자식의 목을 따려 한다.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아. 시민군을 조직하라. …적의 더러운 피로 우리 밭의 고랑을 적시자.”
프랑스 국가(國歌)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 1절 가사다. 섬뜩하다. 이글거리는 민중의 적개심이 느껴진다. 내용이 너무 잔인해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의 가사로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간헐적으로 가사를 순화하자는 움직임이 일기도 한다. 인권국가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언제나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난다고 한다. 노래의 역사성 때문이다.
라 마르세예즈는 1792년 만들어졌다. 혁명의 와중에 군주제 국가들의 침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인의 애국심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만든 노래다. 의용군은 행진할 때마다 이 노래를 불렀고, 마침내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파리에 입성했다.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 공화국의 상징 노래가 됐고 국가가 됐다.
5·18민주화운동 공식 기념곡 지정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진보 진영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곡으로 지정하자는데 반해 보수 진영은 ‘그들의 임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신문광고를 내면서까지 극력 반대하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소설가 황석영과 광주지역 노래패가 항쟁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만든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에 삽입하면서 30년 넘게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 잡았다. 보수 단체들은 일부 가사 내용을 문제 삼고 있으나 라 마르세예즈에 비하면 그야말로 약과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신군부 총칼에 짓밟힌 당시 광주의 시대정신을 오롯이 담고 있다. 그럼에도 굳이 새 노래를 만들어 기념곡으로 지정하자는 주장은 억지스럽다. 지난 3일 정부 주도로 처음 열린 제주 4·3사건 추념식에선 그동안 지정곡처럼 불려 왔던 ‘잠들지 않는 남도’ 대신 생뚱맞게 아무 관련 없는 ‘아름다운 나라’가 울려 퍼졌다.
김민기가 만든 ‘상록수’는 군사정권 시절 금지곡으로 묶였다. 하지만 박세리에게 US여자오픈골프 우승컵을 안겨준 ‘연못 스윙’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국민들에게 IMF 외환위기 극복 의지를 일깨워준 노래로 사랑받았다. ‘임을 위한 행진곡’ ‘잠들지 않는 남도’ 류(類)에 대한 거부반응은 민주화 콤플렉스 때문 아닐까.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