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버린 세 명의 탈북자, 그들의 실존적 고민… 전수찬 장편 ‘수치’
입력 2014-04-18 02:36
문학동네작가상(2004)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소설가 전수찬(46·사진)의 세 번째 장편소설 ‘수치’(창비)는 혼자 살겠다고 가족을 버리고 남한에 정착한 세 명의 탈북자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원길과 동백, 영남이 그들.
원길은 아내와 함께 딸 강주를 데리고 북한을 탈출한다. 그러나 아내는 몽골사막을 건너다 쓰러지고 만다. 원길은 그런 아내를 사막에 남겨둔 채 강주를 업고 돌아선다. 이후 남한에 온 원길은 같은 처지의 영남과 동백을 만난다. 그들은 모두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과 살아남아 생을 이어간다는 수치심을 떨쳐내지 못한다. 동백은 스스로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손가락질 받는 것으로 속죄하려 하지만 죄책감을 덜지 못하고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동백이 떠난 뒤에도 원길은 매순간 자책과 자학을 반복한다. 아내를 버리고도 아무 일 없던 듯 살아가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이라는 그는 스스로를 ‘죽음을 지키는 묘지기’로 규정하며 다만 아내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살아간다. 반면 영남은 새 생활을 시작하겠다며 동계 올림픽을 유치한 지방도시로 이사를 가지만 그곳에서도 삶과 죽음 사이의 처절한 번민은 계속된다.
“여기서 조용히 죽을 작정이었네. 그런데 말이야, 여기 와서 며칠 채소도 심고 닭도 사왔더니, 새벽마다 그놈들 우는 소릴 들으니까, 병이 도진 것처럼 다시 살고 싶었네. 아침에 볕이 들어서 채소가 파랗게 자라는 걸 보니 죽는 게 서러워서 못 견디겠더군. 다시 살고 싶었네. 정말이네. 염치도 없이 살고 싶었네.”(180쪽)
영남이 이사 간 도시의 올림픽 선수촌 공사현장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유골이 다량 출토된다. 민간인 학살의 범인이 미군이냐 인민군이냐 하는 진실공방으로 세상이 떠들썩해지고, 정부는 인민군의 범행이라는 공식입장을 내놓는다. 그러나 정부의 판단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마을로 몰려와 공사를 중단하고 진실을 규명하라며 시위를 벌이고,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길 바라는 지역주민들과 심한 갈등을 빚는다.
‘수치’의 주인공들은 남한 사회의 소수자이자 퇴락한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제3자이다. 작가는 그들의 시선을 통해 수치심에 삶마저 포기하려는 주인공들과 이권 앞에 인간의 도리조차 행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가늠할 수 없는 거리를 보여준다. 탈북자들의 실존적 고민과 이 땅의 윤리적 척박함이 뒤섞인 농도 짙은 명암을 더듬어 보게 하는 작품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