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불타거나 손타거나… 걸작들의 수난사
입력 2014-04-18 02:41
불타고 찢기고 도둑맞은/릭 게코스키/박중서 옮김/르네상스
1911년 8월 21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그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은 당대 유명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화가 파블로 피카소. 당시 “세상의 박물관을 모두 파괴해야 새 것이 올 수 있다”고 주장했던 이들은 루브르를 불태우자는 선언문에도 서명했던 터였다. 그로부터 2년 뒤. 이탈리아에서 “고국으로 모나리자를 데려오고 싶었을 뿐”이라고 주장한 그림 액자 제작자 빈첸초 페루자가 진범으로 잡히기까지 희대의 그림 도난 사건은 무수한 이야기를 남겼다.
옥스퍼드대 문학 박사이자 희귀 초판본 거래 전문가인 저자는 그 중 한 대목에 주목한다. 바로 도난 사건 일주일 뒤 문을 연 루브르 박물관으로 사람들이 몰려온 장면이다. ‘모나리자’가 있던 자리, 당시엔 텅 빈 공간으로 남아있던 곳을 보겠다며 사람들이 찾아온 것이다. 수천 명이 몇 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는데, 프란츠 카프카와 막스 브로트 같은 당대 작가들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저자는 그 현상의 원인을 “과거의 ‘모나리자’가 강력한 현존이라면, 이 그림은 부재 상태에서 더 매혹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분석한다.
‘책 동네의 빌 브라이슨’이라 불리는 저자는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와 ‘게코스키의 독서편력’ 등의 전작으로 국내에서도 마니아 팬을 거느리고 있다. 이번에는 관심 영역을 책뿐 아니라 그림, 건축물 등 다양한 예술 작품으로 확대했다. 모나리자 도난 사건을 시작으로 후대에 미처 전해지지 못한 채 불살라지거나 매장당한, 또는 태어날 때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 예술 작품들의 운명을 추적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하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 원래 이 시의 첫 행이 “처음에 우리는 저 아래 톰의 가게에서 필러를 두 산 마셨지”라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문장이었다면 믿겠는가. 1921년 엘리엇이 쓴 시는 난폭한 아일랜드 몇 사람이 보스턴 시내에서 하룻밤을 보낸 사건에 대한 기록이었다. 당시 가제는 ‘그는 서로 다른 목소리로 순찰을 한다(He do the Police in Different Voices)’ 였다. 에즈라 파운드라는 명민한 편집자가 적극 개입하면서 매혹적인 첫 행으로 바뀌었고, 그의 대표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속사정은 1971년 엘리엇의 미망인 발레리가 이 시의 최초 타자 원고를 갖고 학술적인 주석판을 펴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렇듯 저자는 예술품 절도 시장부터, 위대한 작가들의 원고와 관련 문서가 소장된 아카이브에 이르기까지 흥미로운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윈스턴 처칠의 초상화, 벽난로가 삼켜버린 시인 바이런의 회고록, 카프카의 원고 ‘소송’이 이스라엘로 간 사연까지 다채롭고 풍성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위대한 예술 작품의 상실은 대상의 소실을, 그리고 뒤따라오는 공허한 침묵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며 오히려 그 상실을 통해 예술 작품의 가치를 재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유의 재기발랄하면서도 유머러스한 글 솜씨 덕에 기본적인 배경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가볍기만 한 건 아니다. 유태인 귀도 아들러가 숨진 뒤 말러의 친필 교향곡 악보가 사라졌다 후손의 손으로 다시 들어오는 과정을 통해 나치의 문화재 약탈과 반환 과정을 짚어본다. 또 예술작품을 소유하고, 이를 파괴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느냐는 질문을 통해 문화재 관리에 대한 문제를 깊이 있게 건드린다.
혹시 책의 초판을 둘러싼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면, 신작 ‘북로우의 도둑들’(책세상)을 함께 읽어보길 권한다. 뉴욕의 헌책방 거리 북로우를 배경으로 다양한 책 절도범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에드거 앨런 포의 초기 시집, 단 250부만 찍었던 ‘알 아라프, 티무르’가 뉴욕 공공도서관에서 사라졌다 되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은 한 편의 영화 같다.
미술품 절도의 세계가 궁금한 이들이라면 올 초 나온 ‘사라진 그림들의 인터뷰’(시공아트)에 구미가 당길 듯하다. 캐나다 저널리스트가 2003년부터 8년간 미술품 도둑과 수사관, 변호사, 미술관장, 경매사들과의 인터뷰와 현장 취재를 토대로 생생하게 미술품 뒷거래의 세계를 그렸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