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혜진] 그리운 사람
입력 2014-04-18 02:57
1999년 1월 4일 서울행 첫차에 올라탔다. 동이 트지 않은 아침을 뚫고 내 생애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냉기와 긴장감에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지만 IMF의 칼바람이 가시지 않은 때, 63빌딩보다 더 높아 보이던 사회에 간신히 발 하나를 걸쳤다는 안도감에 무엇이든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취직만 되면 세상 부러울 게 없겠다던 첫 마음은 생각만큼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비록 회사에 몸담고 있을지언정, 나란 존재의 실존적 고민은 사라지는 게 아니었으니까. 이것이 진짜 내 삶일까.
사회생활에 바짝 쫀 나는 달마다 작은 잡지를 한 권씩 사 읽었는데, 한 작가의 칼럼이 너무나 선명하게 가슴에 남았기 때문이다. 잡지를 다 읽고 나면 제일 가슴 치는 구절을 오려서 책상 앞과 수첩에 붙여두며 입속으로 되뇌었다. 사실 이제 막 사회에 도착한 사람에겐 좀 주제 넘는 내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라’ ‘낯선 곳에서 아침을 맞이하라’와 같이 위축된 가슴을 뜨겁게 데워줄 만큼 도발적이었으니까. 다소 어리벙벙하던 사회 초년생에게 그의 조언은 내공 깊은 선배의 조언처럼 든든했다. 이후에도 흔들릴 때마다 다시 그의 책과 이야기를 절실하게 찾아 읽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온 국민이 외환위기라는 무시무시한 현실 속에서 공포에 떨던 때였다. 조직에서 대량 해고가 일어나고, 믿었던 국민 기업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든든하던 아버지들이 채 쉰도 되지 않은 나이에 실직자가 되고 가정이 흔들렸으니까. 그때 그의 말과 책은 이 땅의 수많은 직장인들에게 희망의 불씨가 되어 주었다. 이제는 스스로 ‘나’를 경영해야 할 때라는 죽비소리 같은 일침과 통찰에 삶의 좌표를 수정하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되새겼다. 편집자로 조금 머리가 굵어질 무렵엔 그를 직접 만나 보리라 용기를 내 보기도 했다. 그는 어렵사리 청한 자리에서 경력이 일천한 편집자에게도 늘 여유로운 미소와 경청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4월 13일, 변화경영전문가 고 구본형 소장의 1주기였다. 삶의 변곡점 앞에서 망설이던 이들의 등을 두드려 주고, 자기혁명을 꿈꾸는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던 사람. “우리는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돕습니다”라고 적혀 있던 그의 명함이 아직 수첩에 꽂혀 있다. 그에게 채 못 돌려준 것이 있다면, 어제보다 더 아름다워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이혜진(해냄출판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