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영서 (5) 단돈 1만8000엔 들고 미지의 땅 일본으로 유학

입력 2014-04-18 03:04


기도원에 갔다가 잃었던 신앙을 찾고 신학교에도 들어갔지만 내 관심은 목회자보다 자꾸 사업 쪽으로 기울었다. 사실 목회자의 길은 내가 응답받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뜻이었다. “하나님, 저 사업 쪽으로 한번 나서 볼게요. 이 길 아니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캔터키 프라이드 프랜차이즈에서 힌트를 얻은 나는 일단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어학을 공부하면서 사업경험을 쌓기로 했다. 애써 그간 모은 돈으로 일본행을 준비했다. 현지 학원비에 비행기표를 사고 남은 돈은 모두 혼자 계신 아버지께 드렸다. 가방 하나를 달랑 들고 김포공항을 떠나는 나를 환송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리타 공항에 내려서야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가 아는 단 한 사람도 없는 미지의 땅 일본, 내 주머니엔 1만8000엔이 전부였다.

기숙사에 들어와 라면 한 박스와 냄비, 휴지 등 기본 생필품을 사고 나니 돈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려 거리를 배회했지만 말과 글이 안 통하니 아르바이트는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라면도 점점 떨어져 가자 기도가 절로 나왔다.

“하나님, 큰 뜻을 품고 왔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기도 전에 재정이 심각합니다. 일자리를 주세요. 어떤 것도 좋습니다.”

가만히 있는다고 도와 줄 사람은 없었다. 무작정 집을 나서 시내 중심가에 나가보기로 했다. 중간에 한번 갈아타야 하는데 깜빡 잠이 들었던 나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내렸다. 일본은 잘못 내리면 무조건 나와 표를 다시 끊어야 했다.

전혀 모르는 전철역에 내린 나는 전철값이 아까워 동네 구경을 하기로 했다. 역 앞 중고자동차 판매점에 가니 새 차나 거의 다름없는 차들이 싼값에 팔리고 있어 정말 부러웠다. 점심때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 도시락집 앞에 발 길이 절로 멈추어졌다. 예쁜 데다 참 먹음직스러웠다. 배에서 쪼르륵 소리도 나서 사먹고 싶었지만 형편이 안 되었다. 배고픔의 고통은 사람을 참 처량하게 만든다.

“이랏샤이마세, 도조(어서오세요).” 나이든 여주인이 밖으로 나와 내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말뜻을 이해 못하고 멀뚱거리자 영어로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물었다. ‘코리안’이라고 답하자 여주인은 대뜸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한국말로 “젊은이 들어가세”라며 안으로 나를 이끌었다.

나의 사연을 자세히 들은 여주인은 맘껏 먹으라고 무료도시락을 내놓더니 일자리를 알아봐 주겠다면서 횅하니 가게를 나갔다. 이곳에서 수십년간 도시락 가게를 열어온 제주도 출신의 그녀는 바로 가게와 붙은 ‘유리 만드는 공장’에 나를 저녁 청소원으로 취직시켜 주었다. 창업주가 한국 사람이라고 했다. 나를 졸게 하신 것도, 이 역에 내리게 하신 것도, 도시락집 앞에서 서성거린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인도였다. 그 여주인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분명했다. 다음 날부터 유리공장 청소부로 일했다. 마침 지게차도 다룰 줄 알아 유리를 트럭에 싣는 일도 도맡았다. 농사일로 단련된 손으로 뭐든 빠른 속도로 해치우자 사장은 나만 보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임상, 일 잘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처럼 열심히, 일 잘하는 사람 처음 봅니다.”

월급으로 13만엔을 받았다. 유학생들이 음식점에서 매일 5시간씩 일해도 5만엔을 받기 힘든데 모두 나를 부러워했다. 그래도 이 돈은 학비와 기숙사비로 내고 나면 생활비가 모자랐다. 앞으로 일본에서 계속 지내려면 돈이 더 필요한데 돈을 벌려면 결국 장사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공장 일을 하면서도 틈을 내 리어카에서 닭꼬치 장사를 하다 망했다. 일본에 없는 솜사탕 장사도 하느라 기계를 한국에서까지 들어왔으나 이것도 접어야 했다. 노점상은 야쿠자들에게 시달리고 자릿세도 내야 했다. 내가 일본서 세 번째 시도한 것이 바로 꽃 장사였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