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비루한 현실 위에 미래 향한 언어적 반석 축조

입력 2014-04-18 02:42


빛나는 단도/정철훈/문학동네

정철훈(55)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빛나는 단도’(문학동네)는 그의 문학 여정에 새로운 변곡점이 될 듯하다. 역사 속을 유랑하던 전작과 달리 지금 이 순간 존재론적 의미를 찾아가는 새로운 여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존재론적 고민이란 ‘불편한 승차감’ 같은 어휘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내가 나를 타고 가는 이 불편한 승차감/ 인식하는 순간에 두 개로 쪼개지는 이 존재감/ 모두 마법에 걸려 있다/ 나에게로 가는 길이 지워져 있다”(‘나의 등은 없다’ 부분)

불편한 승차감을 느끼는 화자의 당혹감은 이내 “나에게로 가는 길이 지워져 있다”는 음울한 인식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인식은 매순간 해방을 꿈꾸는 높은 이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곧 시인 개인의 존재론적 규명으로 수렴되면서 ‘비밀 주머니’에서 꺼내 든 ‘빛나는 단도’로 기어이 세상과 시간이 볼 수 있는 ‘언어의 피’를 묻히겠다는 결의로 표출된다. “시간이 앞으로만 진행하는 한, 우리는 모두 지나갈 뿐입니다. 단 한 번 살기에 세상이, 혹은 시간이 볼 수 있게 피를 묻히는 것이겠죠. 나는 그것을 언어의 피, 시의 피라고 생각합니다.”(‘시인의 말’)

그의 시는 일상에서 쓰는 표현과 어휘를 명료하게 부리면서도 투박한 껍질 속 알을 감춘 진주처럼 심원한 통찰을 머금는다. 가령 대학 휴학 중인 조카를 서강대교 부근 빵집에서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시인은 생각한다. “정작 빵집에서 잡담을 나눌 때/ 모든 것은 숨어 있다가도/ 빵집에서 나와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조카의 뒷모습에서/ 모든 것은 재발견되고/ 내가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모든 것은 무참히 사라지고 만다// (중략)// 4월의 대기 속에는 존재를 증발시키는 힘이/ 무시로 춤을 추노니/ 조카 역시 그렇게 나를 발견하고 나를 지우며/ 지하철역으로 총총히 사라져갔다”(‘증발하는 조카’ 부분)

화자는 도처에서 조카를 만나고 헤어지며 심지어는 ‘과거의 조카이거나 미래의 조카’의 잠재적 형상까지 마주한다. 실재하는 대상을 넘어 그것의 가(暇)상태를 승인하는 태도는 타인의 다양한 측면과 조우하게 만든다. 평론가 전철희는 “정철훈을 단순히 복고적 북방정서의 후계자 정도로 규정하던 기존의 평가는 재고되어야 한다”며 “비루한 현실 위 미래를 향한 언어적 반석을 축조하는 작업이야말로 시집 ‘빛나는 단도’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다”라고 평했다.

김나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