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최현수] 베를린이 부럽다
입력 2014-04-17 02:28
“수차례 사악한 전쟁이 일어난 베를린, 천사들은 이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신으로부터 불신당한다. 군국주의, 전쟁, 분단, 이념의 대립으로 얼룩진 베를린에 사는 사람들은 신이 그들의 조국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두렵다.” 독일 영화감독 빔 벤더스(69)는 1987년 개봉된 작품 ‘베를린 천사의 시(원제:Wings of Desire)’에서 베를린 시민들의 심리상태를 이렇게 표현했다. 동·서로 나뉜 도시가 안고 있는 불안함을 그린 이 영화로 벤더스는 그해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영화에서 늙은 시인 호머는 베를린 장벽으로 갈라진 포츠담 광장을 헤매며 과거를 회상했다. 포츠담 광장은 2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에서 가장 혼잡했던 교차로로 사람과 차량이 끝없이 오갔던 곳이다. 하지만 호머가 걷던 그곳은 잡초만 무성한 황무지였다. 영화가 개봉된 지 2년 후인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이듬해 10월 3일 통일독일이 출범했다.
지난 3월 말 벤더스의 영화가 개봉된 지 27년, 동·서독을 갈라놓았던 장벽이 무너진 지 25년 만에 찾은 베를린 포츠담 광장은 호머가 헤맸던 황무지가 아니었다.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를 설계한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진두지휘해 재건축한 포츠담 광장은 19개 첨단 빌딩이 들어서 있는 베를린의 심장부였다. 분단의 흔적은 베를린 장벽 몇 조각을 전시한 곳과 보도블록들 사이에 장벽 지역을 두 줄의 색다른 돌들로 나란히 배치해 좁은 띠처럼 구분해 놓은 것이 전부였다. 포츠담 광장뿐 아니다. 25년 전 서베를린과 한눈에 구별할 수 있었던 동베를린의 낙후된 모습은 말끔히 가셨다.
외관만 변한 것은 아니다. 동질감도 회복됐다. 통일 후 독일인들은 다른 체제에서 생활화된 습관과 생각, 경제적 격차로 인해 서로 배척했다. 통일과정에서 가장 가혹했던 경험은 동·서독군(軍) 통합과정이었다. 구 동독군은 해체됐고 군인들 대부분은 전역해야 했다. 서독군이 주축이 된 독일연방군에 편입된 동독 군인들도 낯선 문화와 강등된 계급을 감수하는 힘겨운 적응과정을 거쳐야 했다.
독일 국방부 청사에서 만난 톨스텐 퀘흘러 해군 제독(소장)은 “진통이 컸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과거 일”이라고 설명했다. 동독출신 한 위관장교도 “차별은 없다. 능력으로 판단 받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구 동독지역 토지소유권 분쟁 등 풀어야 할 사안도 적지는 않지만 벤더스가 그렸던 베를린 시민들의 불안감은 해소됐다.
베를린에서 만난 군 인사와 학자들은 한반도 통일과정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한국이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단 ‘기회의 창’이 열렸을 때 이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그들이 말한 기회의 창은 동독 주민의 거센 민주화 요구와 구소련의 개혁이었다. 구소련의 개혁을 추진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공산당 서기장이 동독 주민의 대규모 시위와 탈출사태로 위기에 처한 동독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했다는 설명이다.
한반도에는 아직까지 기회의 창이 열린 것 같지는 않다. 북한에서 대규모 주민봉기가 일어날 가능성은 낮고 북한의 ‘후견국’ 중국도 북한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포기할 정도는 아니다. 베를린이 부러운 이유이다. 베를린도 이런 기회가 언제 올지 몰랐다. 하지만 서독은 동베를린을 비롯한 동독 주민의 마음을 사는 일에 꾸준히 매진했다.
콘라드 아데나워 서독 초대 총리는 1955년 5월 5일 동독주민들을 향해 “우리는 자유를 획득해 기쁘지만 당신들이 자유롭지 못한 한 그 기쁨은 제 빛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들은 우리를 믿어도 좋다. 우리는 당신들이 인권을 얻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룰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자유세계와 함께 투쟁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북한주민의 마음을 얻는 일은 뭘까. 정부가 드레스덴선언 이후 보다 깊이 고민해야 할 대목인 것 같다.
최현수 국방전문기자 h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