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꿈길

입력 2014-04-16 02:59


폐철길을 걷는다. 옆으로는 봄바다가 출렁인다. 길게 누워 있는 레일 끝으로 바다에 있는 섬들이 올라앉는다. 섬이 출렁일 때마다 레일이 출렁인다. 침목과 침목 사이에서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자갈들이 섬으로 가고 싶어 레일의 베개가 된다. 침목에 누군가 흰 페인트로 쓴 글씨가 보인다. “이대로 놔둬요. 꿈길이니까.” 그렇다. 꿈길이다. 꿈이 없으면 누가 저 섬으로 가고자 할 것인가. 꿈 때문에 우리는 저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리라. 꿈이 인도하는 저 섬이 비록 절망이라 해도.

철도가 본격적으로 이 땅에 길을 연 것은 일제 식민지 시절이다. 비록 그것이 식민통치자 일본의 야욕의 짐꾼이었다 해도 우리의 삶을 밑바닥부터 소리 없이 흔든 것들 중 하나였다.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을 맞춰 정확하게 오는 기차 앞에서 ‘양반’은 이미 의미가 없어졌다. 기차는 ‘양반’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런 의미로 보면 기차는 민중이었다. 소리 없는 혁명이었으며 시간의 새로운 공화국으로의 진입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적 측면으로 보면, 그것은 우리 삶을 속도의 공화국화한 것이었다. 우리는 급해졌으며 속도가 전부인 사회의 나락으로, 특실과 일반실이 확연히 나누인 절망적인 사회로 달려갔다. 빈부격차 또는 계급이 공식적으로 속도의 현장화한 것이었다. 그 사정은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혁명가이던 시인 하이네도 우리의 최남선과 마찬가지로 ‘철도예찬가’를 쓰지 않았던가.

침목과 침목을 밟으며, 그 사이에서 눈부시게 웃고 있는 자갈을 밟으며 폐철길을 간다. 철길가에는 개나리 노오란 꽃잎 사이 ‘철길 위에서 시민들은 깨끗한 동해와 남해를 보고 싶습니다. ――동해남부선 지키기 시민연대――’의 플래카드도 펄럭인다. 다시, 그렇다. 꿈길은 시민에게 돌려주어야만 한다. 기차의 등급이 우리의 신카스트제도가 되어 있는 속에서 폐철길은 평화의 ‘꽃관 쓴 질주’가 되어야 한다. 꿈이 있는 한 그것은 어딘가 빛나는 섬으로 가는 철길이 되리라. 팔을 잔뜩 늘어뜨리고 끊임없이 땅을 쓰다듬고 있는 노오란 개나리, 또는 조팝나무 흰 꽃그림자 사이, 우리 모두 빛나는 레일이 되리라. 어떤 작가의 말이 꽃그림자 사이로 떠올라온다. 장님이 말한다. ‘나는 이제 어둠이 무엇인지 알겠다. 그대가 내 몸을 더 이상 건드리지 않을 때 그것이 어둠이구나.’

폐철길을 걷는다. 그대가 내 어깨를 건드리며 끊임없이 지나간다. 하얀 조팝꽃 눈부시게 환한 세상 속으로.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