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병권] 징역 10∼15년이 약하다는 건가

입력 2014-04-16 03:05


“엄벌주의의 효용성이 확인되지 않는 마당에 중형만 요구하는 것은 데마고그”

사회적 물의를 빚은 사건의 범인들에게 중형을 선고해도 비슷한 유형의 사건이 다시 발생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이런 현상에 깊은 의문을 품은 사람은 형법학자들이 아니라 사회학자들이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 범죄의 원인으로서 사회적 요인을 중시하는 범죄사회학이 태동한 배경이다.

사회는 모방이며 일종의 몽유상태라는 유명한 ‘모방의 법칙’을 주장한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로 대표되는 프랑스학파는 범죄자의 인류학적 측면을 중시하는 이탈리아 학자 롬브로소와 대립했다. 사형당한 죄수들의 두개골을 연구한 롬브로소가 범죄자는 태어날 때부터 인자를 갖고 있다는 ‘생래적 범죄인설’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결과는 사회학자들의 승리.

이후 범죄사회학은 엔리코 페리의 사회적 책임론으로 확대 강화된 뒤 중심이 미국으로 옮겨져 머튼의 아노미론, 서덜랜드 등의 문화전달론, 올린의 분화적 기회구조론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했다. 정신의학, 심리학, 사회심리학과 연계돼 급속한 발전을 이룬 끝에 오늘날 주류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범죄란 개인의 부도덕 또는 파렴치에서 잉태되기보다는 사회적 인자, 이를테면 부의 편중, 지나친 가난 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가령, 아노미 이론은 에밀 뒤르켐과 머튼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 범죄의 원인을 사회구조의 모순에서 찾는다. 사회의 하류층에 범죄가 많은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이다.

머튼은 사회 구성원의 공통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려는 수단 사이에서 불협화음을 내게 하는 현상을 아노미라 불렀다. 가령, 현대사회는 경제적 성공이 강조되지만 모든 사람이 합법적으로 부자가 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목표 달성이 불가능한 사람은 아노미 상태에 빠져 범죄를 통해 목표 달성을 시도하려 한다는 것이다. 즉 준법의식을 상실한 사회구조에서 범죄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모든 범죄의 원인을 사회제도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최근 우리 사회는 지나칠 정도로 범죄자 또는 범죄혐의자에게 가혹한 책임을 묻는 경향이 강하다. 경북 칠곡과 울산에서 발생한 계모에 의한 어린이 학대사망 사건에서도 10년 이상의 징역이 선고됐지만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선고를 하지 않았다는 원망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어린이를 학대해 사망에 이르게 한 계모에게 사형을 선고하면 이런 범죄가 줄어들까. 이런 유형의 범죄는 처음이 아니고 그간 수차례 반복돼 왔다. 문제는 보복심리에 터 잡은 무지막지한 엄벌이 최선의 방책이 아니란 데 있다. 흔히 강력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여론은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다스려야 한다고 목청을 돋우지만 성과가 검증된 바가 없지 않은가.

말하자면 일벌만 있고 백계는 전혀 없었다. 한 사람을 처벌하면 나머지 백 사람이 범죄를 조심하고 피해야 할진대, 그렇기는커녕 이 한 사람마저 판결에 승복하지 못하고 반발심만 가진다면 사회평화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런 관점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사형을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데마고그(선동)일 뿐이다. 말의 성찬과 의욕의 과잉으로 범죄를 줄이거나 소멸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계모 학대사건을 두고 한국여성변호사회 등 일부 단체들이 우리 사회의 각별한 관심과 제도적인 정비 등을 촉구한 것은 이런 점에서 눈여겨봐야 한다. 죄에 상응하는 처벌만 받으면 되는 것이지 그동안 쌓인 감정까지 몽땅 얹어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태도는 비정상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형벌의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범죄 재발 방지와 범죄자의 사회복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번 계모 사건에서는 형량을 기대치보다 낮게 선고했다고 재판부를 비난하기보다는 가족정책을 총괄하는 여성가족부가 도마 위에 올랐어야 했다. 장관급 부처로 출범한 지가 언제인데 여태껏 해체 가정의 유지·존속 방안조차 내지 못했단 말인가. 웃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속은 분명 편하지 않을 것이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