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영서 (3) 어머니 별세 후 사고치고 기도원으로 도망을
입력 2014-04-16 02:59
‘지독하게 가난한 내가 일약 부자가 되는 길이 무엇일까?’
고교 시절, 나는 이 문제에 집중했다. 공부도 못하고 집도 가난한 내가 양평에서 농사만 지으며 살기엔 너무나 억울했다. 그런데 1984년 LA올림픽에서 김원기 선수가 레슬링으로 금메달을 따자 국민적 영웅이 되며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목격했다. 나도 기초체력을 연마하며 어떤 운동을 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며칠 만에 ‘허리통증’만 얻고 포기해야 했다.
당시 전영록씨가 주연한 영화 ‘돌아이’를 본 나는 영화배우가 되면 성공할 것 같았다. 주변에서 ‘잘생겼다’는 소리를 가끔 듣곤 했기에 어머니에게 영화배우 오디션을 보러 가겠다고 졸랐다.
들은 척도 안 하시던 어머니는 내가 워낙 간절히 부탁하자 서울 여의도에 있는 기획사에 함께 가자고 하셨다. 그리고 가는 내내 “하나님, 이 아들이 영화배우 한다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기도하셨다. 기획사에서는 내게 소질이 있으니 일단 연기수업을 받으며 때를 기다리자고 했다. 대신 거액의 수업료를 내라고 했다. 어머니는 짧고 나직하게 한마디 하신 뒤 바로 내 손을 잡아 이끄셨다.
“여긴 아니다. 모두 돈만 탐하는 사기꾼들이다. 마음을 접어라.” 어머니가 원망스러웠지만 큰 금액을 마련할 수 없는 것을 뻔히 아는 처지에 더 이상 떼를 쓸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목회자’가 되길 원하셨고 또 기도하셨다. 그러나 난 1%의 가능성도 없는 일이라 단정했다. 내가 그 정도 신앙도 없지만 거룩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낼 자신이 없었다.
비록 못 배우고 세상물정 모르는 촌부였지만 내겐 신앙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지주가 되셨던 어머니는 4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셨다. 평소 지병도 있으셨지만 과로를 견디지 못하셨던 것 같다.
하늘나라로 가시기 5일 전 내 손을 붙잡고 하신 말씀이 유언이 되고 말았다.
“영서야, 너만은 자랑스럽게 키우고 싶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가니 안타깝구나.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 웃는, 여유 있는 사람이 되거라,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아버님은 바로 새어머니라며 여자를 집으로 들였다. 어머니가 힘들게 가꾸어 놓은 땅도 슬금슬금 파셨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아버지에게 대들 순 없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내 신앙생활도 멈췄다. 왜 하나님은 착하고 고생만 하신 어머니를 일찍 데려가시고 어머니를 괴롭히며 살아온 아버지는 새 여자를 들이며 살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교회도 나가지 않았고 내 멋대로 살기 시작했다. 나를 제어할 어머니도 안 계시니 물을 만난 고기였다.
대학 연극영화과에 원서를 냈다 높은 경쟁률 때문에 실패한 나는 막 인기를 끌던 부동산학과에 입학했다. 부동산업계에 뛰어든 나는 당시 부동산이 크게 활황기여서 학교에 다니면서도 짭짤하게 돈을 벌었다. 부동산 투기 쪽은 보통 폭력조직과 손을 잡아야만 했다. 젊은 혈기에 이들과도 어울리면서 불안정한 청춘을 보냈다.
하나님의 품을 등진 나를 주님은 안타깝게 여기셨던 것 같다. 나는 오랜 기간 어머니의 기도를 먹고 자란 신앙인이었다. 이런 나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은 드디어 나를 수술대 위에 올리시고 ‘연단의 메스’를 대셨다.
친누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이 있어 찾아가 엄포를 놓는 중에 싸움으로 번져 상대가 크게 다치고 말았다. 나는 이 정도면 경찰에 잡혀갈 것이란 생각에 곧바로 시외버스를 타고 줄행랑을 쳤다.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청평의 한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다시 한번 나를 불러주셨다. 이 사건은 내게 ‘전화위복’이란 고사성어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게 만들어 주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