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임영서 (2) ‘86아시안게임 공식 군고고마’ 어릴 적부터 상혼 발휘
입력 2014-04-15 02:17
새벽기도를 나가시기 전 어머니는 항상 잠자는 내게 오셔서 머리에 손을 얹고 지혜로운 아들, 예수 잘 믿는 아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셨다. 그럼에도 나는 반에서 공부도 평균 이하로 못했고 지각 잘하며 등록금은 제일 늦게 내는 말썽꾸러기였다. 담임선생님은 유독 내게 “넌 우리 학급의 암과 같은 존재”라고 노골적으로 면박을 주었다.
술 드시고 걸핏하면 주정하며 어머니를 못살게 구는 아버지, 구질구질한 가난, 해도 해도 끝없는 농사일…. 나는 탈출구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시는데 우리 집은 왜 항상 이 모양인지 불만이 끝없이 차올랐다. 교회 가기도 싫었다. 사춘기와 맞물리면서 이유 없는 반항이 시작됐다.
이런 나를 다스리는 어머니의 방법이 참으로 지혜로웠다. 나는 연약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외아들이니 집안일도 많이 도왔고 특히 지게를 잘 졌다. 중학교 때부터 무거운 짐을 지게로 잘도 날랐다. 하루는 무거운 나뭇짐을 지고 지팡이를 의지해 일어나려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지팡이를 달라고 하셨다. 나는 지팡이 없이 서 있는 것이 불편했는데 어머니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으셨다.
“지팡이 빨리 주세요. 힘들어 죽겠어요.”
“지게작대기 하나 없는데도 일어나기 힘들지. 그래 우리 인생도 반드시 의지해야 할 지팡이가 필요하단다. 많은 사람이 돈과 명예, 권력을 지팡이로 삼으려 하지만 결국 지나면 모두 거품이란다. 넌 항상 하나님을 지팡이 삼고 일어나거라. 주님의 손만 잡아야 한다.”
당시 이 말은 내게 별로 영향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내 가슴속에 겨자씨처럼 심겨져 이후 삶의 위기마다 놀라운 처방전이 되었다. 그 어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내가 하나님의 손을 잡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해결 방법을 얻을 수 있었다. 피할 길을 만들어내곤 했다.
중학교에 다니며 신문을 돌렸다. 당시는 새 구독자를 개발하는 것도 신문배달부의 주임무였다. 그런데 신분 한 부 구독시키는데 대한 수당이 한 달 구독료보다 훨씬 많았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학급 친구들에게 신문 구독을 하면 내가 받는 수당 4000원을 모두 주겠다고 한 것이다. 용돈이 궁한 아이들은 집에 가서 졸라 구독신청을 받아왔고 어떤 아이는 부모님 인맥을 동원해 많은 부수를 갖고 달려왔다. 나는 기본 수당을 나눠주고도 특별수당을 받았고 나중에는 지국까지 인수했다가 다시 비싸게 팔았다. 사람들은 어린 내가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겨울방학 때는 친구들과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했다. 단순히 한 곳에서만 파는 것이 아니라 2명 1조로 봉투팀 장작팀 생산팀 판매팀으로 나누었다. 봉투팀은 군고구마를 담을 봉투를 만들었고 장작팀은 산에 가서 군고구마 구울 땔감을 구해왔다. 생산팀은 가장 맛있게 굽는 방법을 연구해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 이 군고구마를 5개의 판매팀이 예쁘게 만든 종이상자에 담아 직접 팔러 다녔다. 당시 86아시안게임 전이었는데 군고구마 상자에 ‘86아시안게임 공식 군고구마’라고 써붙이고 다니게 했다. 각 팀은 지역별 담당 구역만 돌며 판매를 했는데 아주 잘 팔렸다. 학생들인데다가 아시안게임 공식 군고구마라고 쓴 것을 재미있어했다.
매일 장사를 끝내고 정산하면 친구들에게 일당을 모두 주고 내게 5만원 정도가 남았다. 당시 큰매형이 2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는데 장사의 묘미가 바로 이런 것임을 나는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아버렸다.
내가 만약 혼자 장사를 했다면 이 정도 수입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사업은 사람들을 잘 관리해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것. 이 깨달음은 후일 내가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적용할 첫 번째 힌트였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