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찬희] 야경꾼
입력 2014-04-14 02:49
추재(秋齋) 조수삼은 조선 후기 여항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이다. 기생, 노비, 상인 등 다양한 비주류 인생의 이야기를 담은 문집 ‘추재기이(秋齋紀異)’를 남겼다. 추재기이에는 야경꾼을 다룬 대목이 있다. ‘초경이 되자 야경꾼의 딱따기 소리가 딱딱 들리네. 앞에선 종소리에다 뒤에선 북소리까지 거리가 시끄러워지네(一更擊柝聲格格, 前鍾後鼓喧城陌).’
야경꾼은 야경을 도는 사람이다. 어두운 밤거리를 돌며 화재·범죄를 경계하고 예방하는 게 그들의 일이다.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는 야경꾼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통금은 1945년 9월 7일 미군정이 치안·질서 유지 명목으로 시작한 뒤 82년 1월 폐지될 때까지 긴 세월을 이어왔다. 사이렌이 울리고 통금이 시작되면 거리 곳곳에서 2인 1조를 이룬 야경꾼들이 나무 딱따기를 치거나 호각을 불었다.
통화정책을 펴는 중앙은행은 경제의 야경꾼이다. 경제혈관 어디가 막혔는지, 어디에서 거품이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야 한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국회 인사청문회 때 시스템 리스크 감시자 역할 강화를 강조했다. 그는 “유럽연합(EU)은 물론 미국 영국 등 주요 선진국에서 거시 건전성 정책체계를 구축하면서 중앙은행 역할과 권한이 크게 강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은이 여러모로 제 역할을 못한다는 비난을 받아왔던 걸 생각하면 이 총재 발언은 반갑다. 동시에 당연하게 여겨진다. 현재 우리 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가계부채와 낮아지고 있는 저축률 문제는 한은의 정책 실패라는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금융연구원이 최근 낸 보고서는 부동산·가계부채 문제를 한은의 정책 실패라고 꼬집었다. 2000년 IT버블 붕괴 때와 2001년 9·11테러 뒤 세계경제가 휘청거렸을 때 한은은 콜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낮췄다. 이 결과 우리나라의 2001년 경제성장률은 중국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인 3.0%를 기록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경기가 과열됐는데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낮다는 이유로 한은은 금리를 정상화하지 않았다. 넘치는 유동성은 부동산 거품, 가계부채 거품이라는 괴물을 잉태했다. 한은이 물가라는 나무만 보다 거시경제라는 숲을 보지 못한 셈이다.
서민의 재산과 목숨을 지키는 야경꾼은 고단하지만 중요한 존재다. 새로운 총재를 맞이한 한은이 나무뿐만 아니라 숲도 살피는 야경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찬희 차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