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로테르담·도빌·마라케시영화제 수상… 첫 장편 연출작에 영화계가 깜짝 ‘한공주’ 이수진 감독
입력 2014-04-14 02:28
영화가 시작되면 스크린엔 한 여고생이 등장해 이런 대사를 내뱉는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그런데 ‘잘못한 게 없다’는 소녀의 표정은 시종일관 어둡기 그지없다. 관객 입장에선 소녀의 발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과거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관객은 영화가 한참 진행된 뒤에야 소녀의 ‘과거’를 조금씩 알게 된다. 소녀는 음악을 좋아한 평범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또래 남학생들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하게 된다. 학교는 이 문제를 쉬쉬하고 석고대죄 해야 할 가해자 부모들은 소녀를 상대로 탄원서를 써달라고 달려든다.
영화 ‘한공주’는 이러한 끔찍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 제목 ‘한공주’는 극중 주인공인 여고생의 이름. 영화는 마치 퍼즐을 맞추듯 한공주의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키며 사건의 실체에 다가간다.
최근 서울 종로구 북촌로 한 카페에서 이 영화를 연출한 이수진(37) 감독을 만났다.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 로테르담영화제, 도빌아시아영화제, 마라케시영화제 등 국내외 수많은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휩쓸었다. 일각에서는 ‘올해의 한국영화’라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이 감독은 단편 ‘아빠’(2004) ‘적의 사과’(2007) 등을 선보인 적은 있지만 장편 연출은 ‘한공주’가 처음이다. 그는 “형편이 어려운 집안 자식이 성공하면 상대적으로 더 환영받지 않냐”며 “‘한공주’가 저예산 독립영화여서 평단이나 언론에서 더 호의적으로 봐주시는 것 같다”고 자평했다.
영화는 미성년자 성폭행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다뤘지만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화는 가해자 부모들의 뻔뻔한 태도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주인공 한공주는 엄청난 일을 겪고도 오열하거나 울분을 터뜨리는 일이 없으며 가해자들을 상대로 복수를 꿈꾸지도 않는다.
이 감독은 ‘한공주’를 만들며 세 가지를 염두에 뒀다고 한다. ①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에 집중하지 말자. 이건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②미성년자 성폭행이라는 소재를 영화가 이용한 듯한 느낌을 줘선 안 된다. ③성폭행이라는 내용을 마케팅에 활용하지 말자.
“영화엔 나오지 않지만 공주가 피해자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는 장면도 찍긴 했어요. 공주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오열하는 장면이었죠. 하지만 영화의 분위기에 안 어울려 뺐어요. 공주가 자아를 지키기 위해 자기 안에 벽을 쌓고 사는 모습만 보여주는 게 좋을 거 같았거든요. 관객들이 ‘한공주’를 통해 (미성년자 성폭행 문제 등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영화에서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한공주 역을 맡은 배우 천우희(27)의 연기다. 천우희는 과거 영화 ‘써니’(2011) ‘마더’(2009) 등에 출연하긴 했지만 사실상 무명에 가까운 배우였다. 하지만 그는 ‘한공주’에서 극중 인물이 겪는 아픔을 노련하게 표현해냈다. 이 감독은 “천우희는 동물적인 감각이 있는 배우”라며 “머리로 계산한 뒤 선보이는 연기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할리우드 거장인 마틴 스코세이지(72)는 ‘한공주’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 감독의 다음 작품을 하루 빨리 보고 싶다. 내 나이에도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한공주’는 화제작 기근에 시달리는 요즘의 한국영화계에 단비 같은 작품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17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