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수정] 불신세포
입력 2014-04-12 02:50
온통 못 믿을 것 투성이다. 물건의 가격도 제품의 가치도 정부의 정책도 사회의 안전도 아무것도 선뜻 믿기지 않는다. 내 몸에 아예 ‘못 믿을 것’을 감지하고 경계하는 불신세포가 또랑또랑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도 같다. 그렇다면 나는 불신세포가 보내오는 신호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 걸까.
며칠 전 커피를 사기 위해 인터넷 쇼핑을 했다. 대형마트에서는 9900원, 인터넷으로 사면 8800원이다. 인터넷 쇼핑몰 장바구니에 커피 5상자를 담으니 배송비 2500원을 빼도 3000원 더 싸다. 그런데. 결제창을 클릭하니 불신세포에서 신호가 온다. ‘개인정보를 불법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설명과 ‘개인정보 동의’를 요구하는 내용이 함께 떴다. 못 믿을 게 튀어나온 거다.
깨알 같은 글씨로 구구절절 설명이 적혀 있다. 아니, 개인정보 유출이 일상이 된 마당에 이게 무슨 눈 가리고 아웅인가. 됐다. 내 개인정보를 함부로 제공하지 않겠다. 이러고 결제 취소를 클릭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 개인정보, 동의. 깨알같이 적혀 있어도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 약관, 동의. 마침내 결제. 돈은 물론이고 개인정보도 내 줘야 결제를 해 주겠다니 별 도리가 없다. 불신세포가 보낸 신호는 3000원을 아껴야 한다는 경제 논리에 밀렸다. 어차피 개인정보는 공공재라는 위안 아닌 위안을 해 봤다.
마트 수산코너를 지날 때에도 어김없이 불신세포가 가동된다. 제주산 갈치. 제주에서 잡았다니까 틀림없겠지 이러다가도, 저 갈치가 제주에만 머무르지는 않았을 테니 제주산이라고 못 박을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솟구친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 일본산을 국산으로 속여 판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출처가 분명치 않은 소문에 휘둘려 무작정 의심하는 것은 부당하다. 확실한 것은 역시 당사자에게 확인하는 것이다. 죽은 생선을 붙들고 어느 바다에서 왔느냐고 추궁을 했다가는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겠지. 못 믿겠거든 안 먹는 수밖에. 먹어 봤자 내가 기억하는 그 맛이다. 추억만 하기로 하고 은빛 갈치로부터 표표히 떠난다. 비싸기도 하니까 경제 논리로도 타당한 선택이다. 마트 수산코너 앞에서만큼은 불신세포가 제대로 작동한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불신세포는 내내 경계경보를 울렸다. 경험적으로 봤을 때 지키지 못할 약속이 난무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았다. 다만 ‘당선되면 어르신들께 한 달에 20만원씩 드리겠다’는 식의 ‘모두에게 복지를 약속한다’는 공약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인수위원회가 꾸려진 뒤 기초연금을 국민연금과 엮으려 한다는 보도가 연일 나왔다. 설마 국민들이 직접 내는 보험료만으로 굴러가는 국민연금을 갖다 쓸 수 있을까. 논란은 계속됐다. 역시나 100%였던 약속은 재정부담을 이유로 70%가 됐고, 70%는 다시 국민연금과 연계해 차등지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원래 약속에서 깎이고 꼬인 기초연금법이 아직 만들어지기도 전에 정부는 7월부터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지키지 못할 약속과 지킬 자신 없는 약속이 이어졌다. 내 불신세포는 과부하에 빠졌다. 인터넷 쇼핑이나 갈치를 사는 문제는 최소한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이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과부하가 걸렸던 불신세포는 이제 지독한 무력감을 경험하고 있다.
정부 논리는 명쾌하다. 기초연금을 국민연금과 연계하지 않으면 2060년 조세부담이 어마어마해진다는 것(국민연금과 연계하면 2060년 필요한 재정이 228조원, 연계하지 않으면 264조원으로 추산된다). 2060년은 국민연금 재정이 고갈된다는 시기다. 재정고갈이라니 무시무시하다. 그래서 2007년에 법을 바꿔 국민연금 지급 수준을 대폭 낮췄다. 이를 보완하는 성격의 복지 서비스가 소득 하위 70%에 지급되는 지금의 기초노령연금이다.
다시 2060년이 부각됐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2060년을 살아갈 후세대를 위해 국민연금을 받는 국민은 기초연금을 조금 덜 받아도 괜찮지 않겠냐고 이야기 한다. 2060년을 걱정해 국민연금 지급 수준이 깎였는데, 다시 2060년을 걱정하며 국민연금 수급자에게 ‘죄송하지만 양해를 구한다’며 희생을 강요한다. 정부 이야기를 듣다 보면 2000만명 넘는 국민연금 가입자는 지나치게 기득권자인 것 같다. 그저 국가를 믿고 열심히 번 돈을 보험료로 내고 노후에 연금으로 돌려받으려는 것뿐인데 말이다.
경제논리로 무장한 복지부라니 참 의아스럽다. 복지 혜택을 줄이더라도 조세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야말로 진짜 복지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 복지는 누구를 위한 복지인 걸까.
무기력해질 대로 무기력해진 불신세포지만 깜박깜박 신호를 보내온다. 몇 달 앞의 약속도 못 지키는 정부가 2060년 일을 약속하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신호다. 하지만 달리 응답할 방법이 없다. 선량한 시민은 법이 만들어지면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
문수정 사회부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