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100일 동안 100만명 살육… 하나님을 의심했죠”

입력 2014-04-12 02:04


르완다 대학살때 극적 생존 고난 칼릭스트 쉬킬리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후투(Hutu)족은 닥치는 대로 대검(machete)을 휘둘렀다. 사람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살랐다. 소년의 가족을 포함해 투치(Tutsi)족 수만 명이 아프리카 르완다 곳곳에서 숨졌다. 열다섯 살 소년은 학살 직전 도망쳤다. 1994년 100여일 동안 투치족 80만명을 포함해 약 100만명이 희생됐다. ‘르완다 대학살’로 불리는 사건이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칼릭스트 쉬킬리(35)씨를 고난주간을 앞둔 지난 8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캠퍼스에서 만났다. 그는 전날 주한 르완다대사관과 극동방송이 공동 주최한 ‘르완다대학살 추모 20주년 행사’에서 당시 학살에 대해 증언했다.

벚꽃 잎이 바람에 날리는 평화로운 캠퍼스에서 만난 그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는 20년 전 르완다 대학살에서 부모와 두 형과 네 명의 누이를 잃었다.

“대학살의 주된 원인은 벨기에의 식민지 지배 전략이에요. 저희 투치족은 1919년부터 40여 년 동안 벨기에가 소수 투치족을 앞세워 다수 후투족을 지배하도록 했어요.”

62년 독립 직후 투치족이 정권을 인수했다가 73년 후투족이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쉬킬리는 후투족이 투치족을 억압하던 이 시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년에 올라갈 때마다 선생님은 투치족을 한 명씩 일으켜 세웠어요. 1번 2번 3번…. 그러면 후투족 친구들이 저희를 따돌렸어요. 그때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몰랐죠.”

90년대 초반 정권을 둘러싼 내전이 계속됐다. 두 부족 간 평화협정이 한창 논의되던 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의 당시 대통령이 암살됐다. 대학살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 투치족이 암살을 기획했다고 본 후투족이 ‘피의 보복’을 시작했다. 쉬킬리의 부모는 당시 수도 키갈리 인근에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했다. 그는 3남5녀 중 막내였다.

“가까이 살던 이웃들이 칼을 들고 우리를 위협했어요. 하루 이틀 만에 저희 마을 부족이 대부분 숨졌죠. 전 사력을 다해 도망쳤어요. 여기저기 몸을 숨기며 100일을 버텼어요. 저희 마을 부족 2만5000여명 중 15명이 목숨을 건졌어요. 저와 제 누이 한 명이 생존자에 포함됐죠.”

그의 머리 위로 벚꽃 이파리가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고통이 얼굴에 스치기도 했다.

“저희 가족은 모두 크리스천이었어요. 하지만 함께 교회를 다니던 이들도 이웃을 마구 죽였어요. 그날 이후 저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었죠.”

대학살의 충격과 가족을 잃은 고통으로 삶의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성경을 펼쳤다.

“혼자 성경을 읽었어요. 예수의 탄생,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우리나라가 겪어온 고통을 떠올렸어요. 우리 가족이 비명 속에 숨질 때 하나님은 자고 계셨던 걸까. 나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걸 계속 생각하다 보니 피의 보복은 하나님이 한 게 아니라 인간들의 죄 때문에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살아남은 게 ‘기적’ 같았어요.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 이유가 있을 것 같았어요.”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르완다국립대(NUR)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정부기관에서 일하다 지난해 8월부터 경희대대학원 정보디스플레이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밟을 기회를 얻었다.

“지난 2월 남북이산가족 상봉 뉴스를 보면서 한국인 친구한테 헤어진 뒤 얼마나 됐냐고 물어봤어요. 반세기가 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르완다와 한국은 비슷해요.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작은 나라이고 둘 다 내전을 겪었죠. 르완다가 과거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현재 서로 협력하는 것처럼 한국도 남과 북이 협조해야 해요. 통일이 쉽진 않겠지만 우리 모두 기도해야 할 일이에요.”

마지막으로 그에게 자신의 소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어제 기념행사에서 하나님이 날 살린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증언하는 거죠. 공부를 마치면 고국으로 돌아가 르완다가 한국처럼 발전하도록 기여하고 싶어요. 제가 어릴 때 가족을 잃었잖아요. 천국에서 가족들을 다시 만나겠지만 르완다에 있는 여자친구랑 빨리 결혼해서 가능한 많은 자녀를 두고 싶어요.”(웃음)

쉬킬리의 어깨 위에 축복 같아 보이는 꽃잎이 사뿐히 내려앉고 있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