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노트-오인숙] 두 개의 거울
입력 2014-04-12 02:58
우리 집에는 몇 개의 거울이 있다. 그중에서도 자주 보게 되는 두 개의 거울이 있다. 거실 벽에 붙어 있는 거울과 세면실 거울이다. 세면실에 있는 거울은 거울 위에 형광등이 달려 있다. 그래서인지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여지없이 드러난다. 잔주름이나 작은 점까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에 비해 거실에 있는 거울은 흐릿한 편이다. 적당히 보이지 않을 것은 보이지 않는다. 거실 거울보다 세면실 거울이 더 정직하고 임무에 충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실 거울을 보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흠이 적당히 가려지기 때문이다. 세면실 거울은 나를 정확하게 평가해 주지만 불편하다. 마치 평가적 인지가 잘 발달한 사람 같다. 무엇을 보건 평가의 관점으로 보는 평가적 인지는 타인이나 자신까지도 평가하는 골치 아픈 역기능적 인지이다. 평가는 비난이라는 정서적 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이 있겠는가, 그래도 인생이 아름답고 사람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허물을 가려주고 덮어가며 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서로를 평가하고 비난하는 것처럼 나의 잘못 하나 하나를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보시고 평가하신다면 내가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아일랜드에서 있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느 교회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는 일이 있을까?” 하고 물었다. 아이들은 “없어요.” 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그런데 한 어린 소년이 “예, 하나님께서 못 하실 일이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교사는 예상치 못한 답에 당황하여 소년에게 다시 물었다. “하나님께서 못 하시는 일이 있다고?” 소년은 대답했다. “예,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내 죄를 보실 수가 없어요.” 어린 소년의 대답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덮으시는 사랑에 새삼 감사를 느끼게 된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32:1) 나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로 허물이 가리워진 그리스도인이라면 남의 허물, 내 허물을 드러내려 하는 일을 그만 해야 할 것 같다. 정확히 내 허물을 드러내는 세면대 거울 같은 사람보다 마치 사랑으로 허물을 덮는 사람 같은 거실의 거울이 더 정겹다.
오인숙(치유상담교육연구원 교수·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