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칼럼] 내일을 위해 어제를 용서하자

입력 2014-04-12 02:58 수정 2014-04-12 10:37


세계역사에 항상 불행과 비극이 있어왔다. 전쟁과 테러는 내세운 동기나 목적과 달리 결과는 항상 참혹한 비극이다. 그런데 강자의 일방적인 침략과 침탈로 약자가 처참한 희생자로 전락하는 상황이 부지기수다.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한 일본의 만행이 그러하고, 서구 열강들의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지의 식민제국주의화가 그 본보기이다. 세계 곳곳을 보면 이런 식민통치와 제국주의 압제에서 독립하여 자유국가가된 경우도 많지만, 여전히 허울 뿐인 해방이어서 그 후유증으로 오히려 더욱 극심하게 민족내적 갈등과 내전에 휩싸여 집단 비극을 초래하고 있는 현실이 비일비재하며 세계시민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유엔이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여 잠정적인 외형상 평화는 유지하나 해당국들의 자주적 평화건설의 길도 희망도 요원해 보이는 안타까운 현실이 즐비하다.

근·현대 세계역사에서 식민지배 그리고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는 수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지배의 동기와 논리가 가장 허망하고 치졸하지만, 반대로 해방과 독립이 가장 아름답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마무리된 경우가 하나 있다. 남아공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오랫동안의 식민제국 통치하에서 흑인들이 받은 물리적 정신적 고난도 엄청났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백인 억압통치의 끝과 흑인자주권의 시작이 절묘한 아름다운 화해의 과정을 거쳐 실현되었다는 말이다.

화란은 남아프리카에 350여년간 무자비한 제국적 식민통치를 자행했다. 소수 백인종에 의한 다수 흑인종 불법지배였다. 남아공의 인구구성은 지금도 흑인종을 필두로 유색인종이 약 84%, 백인종이 16%를 점한다. 화란 백인들이 몰려와 남아공의 공용어가 된 화란어의 이름을 ‘아프리카안스(Afrikaans)’라 칭하고, 또 화란어 발음을 따서 백인종인 자신들을 ‘아프리카아너(Afrikaaner)’ 혹은 ‘아프리칸더(Afrikander)’라고 별칭하며 특권적으로 살아왔다.

흑백인종간의 분리는 신의 인종분리라는 창조질서에 속한다면서 흑백차별을 신앙적으로 아니 신학적으로 정당화했다. 그들의 발음으로 이를 ‘아파르트하이트(Apartheid)’라 칭한다. 아파르트하이트는 차별적 분리를 이념화 내지 종교화한다. 흑백을 아예 같은 인간 범주에 넣지 않으려 한다. 미국 백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데려와 차별했으나, 남아공 백인들은 흑인의 땅을 점령해 들어와 차별화했다.

하지만 27년간 로벤섬의 감옥에서 석방된 흑인해방운동의 지도자 넬슨 만델라가 자유선거를 통해 1994년 5월10일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아파르트하이트는 공식적으로 종료를 고했다. 종신 대통령으로의 추대를 거부한채 한번의 임기(1994년 5월~99년 6월)를 마치고 은퇴했다. 그러다가 작년 12월6일 사망했는데 온 세계가 크고 깊게 애도했다. 종신직 권력의 자리에 있었던들 그만큼의 존경과 찬사 또 그런 감동적이며 지속적인 영향력은 없었으리라. 자유함을 얻은자가 획득한 자유를 이기적인 욕망과 영예를 누리는데 쓰지않고, 이웃들을 ‘사랑으로 섬기며 헌신하려고’ 결단한 삶, 그 아름다운 ‘내려놓음’은 거대한 힘이요 매력이었다. 이것을 우리가 배우고 전파해야 한다.

또 하나의 힘이 있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여러 색깔로 이루어진 무지개 국가를 만들자. 그러려면 갈등의 쌍방이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 과거를 잊지는 않겠으나 용서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정신적 동반자인 투투 대주교를 위원장으로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꾸려 지난날의 죄악상을 정직하게 규명하되 보복은 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사면하고 용서하는 대변혁을 성사시켰다. 가해자는 진실을 고백하며 용서를 빌었고, 피해자는 진실규명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가해자를 용서하는 대화해를 실현했다. 잊지말아야 죄악의 반복을 막는다.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진정 자유하며 미래건설을 위해 손잡을 수 있다. 피해자 스스로도 용서를 통해 자신을 항상 억누르고 옥죄던 멍에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고 과거를 망각하는 자의 미래는 허망하고 치졸하다. 과거의 잘못을 디딤돌 삼아 일어서면 미래의 희망이 알차게 펼쳐진다.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는 자는 힘있는 자다.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자는 더 힘있는 자이다. 분노는 원수를 더욱 원수되게 하나, 용서는 자신을 자유케하고, 원수를 친구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그것이 용서의 힘이다. <경동교회 담임목사>

(경동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