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디지털의 역습] 똑똑한 스마트 시대… 뇌는 녹슨다

입력 2014-04-12 02:46


대기업 부장인 A씨(47)는 최근 회식 후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뒤 적잖게 고생을 했다. 술에 취한 채 집에 가기 위해 택시에 올랐는데 집 앞에 도착해서야 겉옷이 바뀐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옷 안에 휴대전화는 물론 지갑까지 넣어뒀던 A씨는 당장 택시비를 낼 수가 없었다. A씨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택시기사에게 휴대전화를 빌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내의 휴대전화 번호는 떠오르지 않았다. 딸의 휴대전화 번호도, 집 유선전화 번호도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A씨는 자신의 소지품을 택시기사에게 맡긴 뒤 택시비를 가져오기 위해 집으로 향해야 했다.

직장인 B씨(32·여)는 지난 주말 서울 한복판에서 한동안 어디로 갈지 모르는 미아가 됐다. 볼일을 보기 위해 차를 몰고 시내에 나왔는데, 갑자기 내비게이션이 먹통이 됐다. B씨는 전에도 이곳을 수차례 찾았었지만 항상 내비게이션 화면과 음성 안내에 의지하다 보니 주변은 전혀 살피지 않았다. 그는 11일 “믿었던 내비게이션이 먹통이 되니 내 위치가 어디인지조차 전혀 알 수 없었고,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며 “내비게이션은 5분쯤 뒤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길 한가운데서 겪었던 공포와 당혹스러움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A씨와 B씨의 사례는 최근 현대인들에게 많이 발생하는 ‘디지털 치매(Digital Dementia)’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디지털 치매는 2004년 국립국어원에 처음 등장한 신조어다. 지난해 국내에 출간된 책 ‘디지털 치매’ 저자인 독일의 뇌 과학자 만프레드 슈피처는 디지털 치매를 ‘디지털 기기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해 뇌 기능이 손상돼 어느 순간부터 인지 기능을 상실하는 치매의 일종’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의 뇌 세포는 외부에서 정보가 유입되면 몇 초에서 몇 분 정도까지 정보를 단기로 기억했다가 반복학습을 통해 장기 기억으로 이전시킨다. 그런데 디지털 기기가 생활화되고 뇌 대신 디지털 기기에 정보를 저장하게 되면서 단기 기억을 반복해 학습할 필요가 없어졌다. 전화번호를 외우거나 주위 지형을 기억해 길을 찾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뇌의 특성상 새로운 정보가 지속적으로 유입돼야 세포가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면서 뇌는 점점 활동 영역을 잃고 퇴화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디지털 치매는 단순히 기억력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하며 치매처럼 실제 뇌 손상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가볍게 넘겨버릴 일도 아니다. 디지털 치매로 기억력 감퇴가 심해지면 진짜 치매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사회성과 집중력 결여로 이어져 일상생활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게다가 기억력 감퇴로 인한 스트레스를 유발해 공황장애, 정서장애 등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세계 최고 디지털 강국이라는 대한민국은 명성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서 우리 국민 10명 중 3명은 디지털 치매 증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이준홍 치매예방센터 소장은 “디지털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디지털 기기를 멀리하고 규칙적인 운동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사회생활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고, 독서와 토론같이 머리를 쓰는 활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노용택 기자 nyt@kmib.co.kr